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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시인과 작곡가의 의기투합…합창극 된 ‘눈사람 자살 사건’

등록 2022-08-27 08:00수정 2022-08-29 02:33

30일 예술의전당서 초연 ‘마지막 눈사람’
최우정 교수, ‘눈사람’ 시인 최승호 만나
시 100여편 녹여낸 70분 합창극으로 완성
자타 공인 독보적 극장음악 전문가 최우정 서울대 작곡과 교수가 최승호 시인의 ‘눈사람’ 시들에 곡을 붙인 전막 합창극 <마지막 눈사람>을 오는 30일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린다.  국립합창단 제공
자타 공인 독보적 극장음악 전문가 최우정 서울대 작곡과 교수가 최승호 시인의 ‘눈사람’ 시들에 곡을 붙인 전막 합창극 <마지막 눈사람>을 오는 30일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린다. 국립합창단 제공
시인과 작곡가가 만났다. 2년 전, 시인이 집필실로 애용해온 서울 양재동 카페에서였다. 눈사람이 화제에 올랐고, 숫자 8처럼 생긴 모습이 꼭 무한(∞)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얘기도 나눴다. 그 순간 작곡가의 뇌리에 퍼뜩 스치는 게 있었다. 작곡가는 눈사람을 소재로 합창으로 이뤄진 극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고, 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사람에 관한 시를 많이 쓴 시인 최승호, 자타 공인 극장음악 전문 작곡가 최우정 서울대 교수였다. 오는 30일 국립합창단 초연으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오르는 합창극 <마지막 눈사람>은 이렇게 시인과 작곡가가 의기투합해 잉태됐다.

“저는 사람의 목소리를 좋아하고, 이야기를 좋아하고, 여러 가지 섞어놓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난 18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최우정(54) 교수는 “콘서트홀을 극장으로 만들고 싶다”며 “오페라에서 보듯 콘서트홀도 원래 극장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콘서트홀의 극장화’를 꿈꿔온 그가 이번엔 합창에 드라마를 입힌 합창극 형태로 이를 구현하는 셈이다. 최 교수는 합창극을 ‘드라마가 살아 있는 합창’으로 설명했다. “극장이 아니라 콘서트홀에서 하는 오페라라고 보면 돼요. 연극과 합창의 결합이 오라토리오인데, 이것을 현대적 형태로 살리려고 했어요.”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에선 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레치타티보’가 있는데, 배우 김희원이 이 역할을 맡는다.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를 현대적으로 살리려고 했어요. 김희원이 ‘현대적 변사’인 셈이죠.”

“나는 말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해서….” <마지막 눈사람>은 김희원이 읊는 이 대사로 문을 연다. 합창단원들이 무대에 들어서면 김희원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어느 날 나는 지상에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웅장한 합창곡이 흐른 뒤 다시 내레이션. “빙하기가 지상의 피를 다 얼려버린 것이다.” 이야기는 빙하기 지구에 홀로 남은 눈사람의 독백을 중심으로 흐른다. 가사와 대사는 최승호 시인의 시를 거의 그대로 차용했는데, 100여편의 시가 녹아들었다. 전주곡과 후주곡에다 12개의 합창곡이 더해진 러닝타임 70분의 합창극에 윤의중 국립합창단장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다. 윤 단장은 온전히 하나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전막 합창극’ 창작을 최 교수에게 의뢰하면서 내용과 형식은 전적으로 작곡가 재량에 맡겼다. 윤 단장은 이번 공연에서 지휘를 맡는다.

작곡가 최우정 서울대 교수는 클래식 음악에 뿌리를 두면서도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 등 극장음악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국립합창단 제공
작곡가 최우정 서울대 교수는 클래식 음악에 뿌리를 두면서도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 등 극장음악을 꾸준히 만들어왔다. 국립합창단 제공
작품의 기둥은 ‘눈사람 자살 사건’이란 최승호의 시다. “눈사람이 욕조에 누워 찬물에 녹아 죽을까, 따뜻한 물에 녹아 죽을까 고민하다 이왕이면 따뜻한 물에 녹아 죽고 싶다는 내용이 나와요. 이 시가 현실적 장벽으로 힘들어하는 젊은층의 많은 공감을 얻는다고 들었어요.” 최 교수는 “환경이나 기후위기에 관한 내용이 있지만, 꼭 그 메시지에 국한하진 않는다”며 “기후위기와 디스토피아를 중심으로 풀어가려는 유혹이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다 아는 뻔한 얘기가 돼버릴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고 털어놨다. “합창은 특정 집단의 이념을 대변하는 역할을 많이 했지요. 근데 저는 집단 전체의 이야기를 개인에게 강제하는 이야기는 거북스러워요. 예술은 내 개인의 이야기가 우리 전체의 얘기가 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움직이지 못하는 눈사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수동적 존재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읽어내려 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클래식에 뿌리를 두면서도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에 국악을 접목하며 늘 새로운 실험을 모색했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창작 뮤지컬 <광주>와 오페라 <1945>를, 연출을 겸하는 극작가 고선웅과 함께 만들었다. 그는 뮤지컬에 애착을 보였다. “뮤지컬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아요. 음악과 연극에 더해 오페라에 없는 대중성까지 갖춘 게 뮤지컬이거든요.” 그는 “뮤지컬 <광주>가 오는 11월 미국 뉴욕에서 쇼케이스를 연다”며 브로드웨이 진출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뮤지컬에 대한 그의 지향점은 ‘가난한 뮤지컬’ 또는 ‘최소극장 뮤지컬’이다. “피아노 1대에 배우 1명이 하는 뮤지컬 같은 거 하고 싶어요. 악기 적고, 마이크 안 쓰고, 관객들 가까이 다가가려는 거죠.” 그는 지난 봄, 서울 인사동의 한 화랑에서 이와 비슷한 공연을 했다. 배우 배성우와 악기 5대의 단출한 조합이었다.

장르를 섞고 경계를 넘나드는 작곡가 최우정의 종횡무진 음악 행보는 연원이 깊다. 1990년대부터 연극음악을 만들었고,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창작 뮤지컬 <광주>와 오페라 <1945>를 연출가 고선웅과 함께 만들었다.  국립합창단 제공
장르를 섞고 경계를 넘나드는 작곡가 최우정의 종횡무진 음악 행보는 연원이 깊다. 1990년대부터 연극음악을 만들었고,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창작 뮤지컬 <광주>와 오페라 <1945>를 연출가 고선웅과 함께 만들었다. 국립합창단 제공
장르를 섞고 경계를 넘나들며 종횡무진하는 그의 음악 행보는 연원이 깊다. 이미 1994~95년에 <오구> <허재비 놀이> 등의 연극음악을 만들었다. 이후 우리극연구소, 연희단거리패 등 극단들과도 오래 작업했다. 극장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오는 10월7~8일 광주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여성의 삶을 다룬 무용극 <마디와 매듭>을 공연한다. 극작가 배삼식이 대본을 썼고, 전방위 예술가 정영두가 안무를 맡았다. 음악극 <적로>(2017년)에 이어 이 특출난 3인조가 함께 만드는 두번째 작품이다. 2024년 문을 여는 부산 오페라하우스 개막 공연도 이 세 사람이 책임진다.

작곡할 때 어디에서 영감을 얻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뜻밖에도 “영감을 믿지 않는다”고 답했다. “엄청나게 다양한 소리가 늘 떠다니고 있지요. 영감이란 핑계 같은 거라고 봐요. 손이 일하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거죠.” 그는 부지런히 기록하고 틈나는 대로 메모하는 ‘기록광’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일기도 써왔다. 그의 연구실엔 피아노와 거문고가 놓여 있었고, 칠판에 그려진 오선에는 음표가 빼곡했다. 재즈와 탱고에 관한 책도 더러 눈에 띄었다. “작곡가는 부지런히 곡을 만들어야 해요. 작곡이 일상의 루틴이 되어야 하는 거죠. 운동이나 마찬가지여서 날마다 계속 곡을 써야 합니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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