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 금요일, 기자와 한 연예기획사 팀장이 점심을 함께했다. 팀장은 “기자들 문의 전화가 많이 와 빨리 회사에 들어가봐야 한다”며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헤어졌다. 통상 주말을 앞둔 금요일은 신문사와 기획사가 바쁘지 않은 경우가 많았지만, 이날은 특별했다. 그 기획사 소속 아이돌이 새 노래를 금요일에 선보였기 때문이다.
블랙핑크, 트와이스 등 이달 컴백한 그룹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 금요일 특정 시간에 앨범과 음원을 공개했다. 22개월 만에 완전체로 컴백한 블랙핑크는 금요일인 19일 낮 1시 새 노래 ‘핑크 베놈’을 공개했다. 이 노래는 29일(현지시각)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에 22위로 진입했다. 앞서 하루 전 열린 ‘2022 엠티브이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블랙핑크는 2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계약기간 만료를 앞두고 전원 재계약을 마친 트와이스도 미니 11집 <비트윈 원앤투>와 타이틀곡 ‘톡댓톡’을 금요일인 26일 낮 1시에 발매했다. 왜 유독 금요일일까? 거기엔 우리가 모르는 비책이라도 숨어 있을까?
블랙핑크 새 노래 ‘핑크 베놈’ 예고 포스터. 와이지엔터테인먼트 제공
이는 미국 음반 순위 차트인 빌보드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금요일 낮 1시는 미국 동부시간 기준으로 보면 금요일 자정이다. 빌보드는 미국 동부시간을 기준으로 매주 금요일부터 그다음주 목요일까지 결과를 합쳐 차트에 반영한다. 빌보드 차트 진입을 최대치로 끌어내려는 전략인 셈이다.
미국 팝 시장에서 금요일 신곡 공개는 관례로 자리 잡았다. 케이티 페리, 두아 리파, 마일리 사이러스, 드레이크 같은 팝스타도 금요일에 음원을 발매하고 있다. 워너·유니버설·소니 뮤직 등 세계적인 음반사도 이에 동참하고 있다.
트와이스 새 앨범 <비트윈 원앤투> 예고 포스터. 제이와이피엔터테인먼트 제공
케이(K)팝 가수들은 언제부터 이런 움직임에 함께하고 있을까? 2020년부터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을 필두로 글로벌 팬덤이 증가하고, 팬덤의 화력 지원으로 빌보드에서도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탄소년단이 2020년 8월 ‘다이너마이트’를 선보인 요일과 시간 역시 금요일 낮 1시였다. 블랙핑크도 같은 달 영어 노래 ‘아이스크림’을 금요일 낮 1시에 공개했다. 지난 6월 방탄소년단이 9년 활동을 정리한 앤솔로지(기존 작품 모음집) 앨범 <프루프>를 선보인 요일과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글로벌 팬덤이 있는 케이팝 가수는 이렇게 금요일 낮 1시를 선호하지만, 그렇지 않은 그룹이나 새로 데뷔하는 그룹은 다른 요일을 선택하기도 한다. 월요일 저녁 6시다. 이른바 ‘민희진 걸그룹’이라고 불리는 뉴진스는 지난달 금요일인 22일 자정에 ‘어텐션’ 뮤직비디오를 공개하며 데뷔했지만, 데뷔 앨범 음원은 월요일인 이달 1일 저녁 6시에 정식 발표했다.
이는 국내 음원차트의 주간 순위 집계가 월요일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보통 국내 음원차트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음원 성적을 집계해 점수에 반영하기에 월요일이 음원차트 상위권에 오르기 좋은 기회다. 저녁 6시는 스트리밍이 집중되는 퇴근길과 하굣길 음원차트를 공략하기 위해서다.
뉴진스는 신인 그룹이어서 빌보드에 도전하기보다, 국내 음원차트에 좀 더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뉴진스의 데뷔곡 ‘어텐션’은 9일 멜론 실시간 차트 정상에 올랐다. 올해 데뷔한 케이팝 그룹 가운데 멜론 실시간 차트 1위를 찍은 팀은 뉴진스가 처음이었다.
이후 ‘어텐션’을 제치고 멜론 실시간 차트 1위에 오른 노래는 아이브의 ‘애프터 라이크’였다. 이 노래 역시 월요일인 22일 저녁 6시에 공개됐다. 르세라핌도 5월 데뷔 앨범 <피어리스>를 월요일인 2일 저녁 6시에 내놨다.
이런 흐름이 자리 잡은 것은 2018년부터다. 이전에는 대부분 신곡은 자정에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용자가 거의 없는 새벽 시간에 팬들이 좋아하는 가수의 차트 순위를 높이기 위해 음원 스트리밍과 다운로드를 독려하는 이른바 ‘음원 총공(총공격)’으로 차트 순위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에 음원 사이트들이 새벽 시간대의 스트리밍과 다운로드 반영 비율을 줄이자 저녁 6시가 새로운 타깃 시간대로 자리 잡았다.
한 대형 기획사 팀장은 “케이팝 신곡 발표 시간대는 빌보드 같은 글로벌 시장을 고려하기도 하고, 국내 음원 사이트 같은 안방 시장을 고려하기도 한다”며 “이는 차트 진입 순위를 조금이라도 높여 보려는 마케팅 전략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또 “음원이나 앨범의 발표 요일을 살펴보면 글로벌과 안방 시장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핑크 베놈’이 실린 블랙핑크의 정규 2집 <본 핑크>는 다음달 16일 나온다. 금요일이다.
정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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