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추앙받는 기돈 크레머가 9월 초 내한 공연을 한다. 그는 정치·사회적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 ‘행동하는 음악인’의 면모를 보여왔다. 크레디아 제공
기돈 크레머(75)에게 붙는 ‘현존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란 수식어에 이의를 제기하는 건 쉽지 않다. 이를 입증하듯 그는 수많은 공연과 음반을 통해 독보적인 기량을 선보였다. 연주만 탁월한 게 아니라 ‘행동하는 음악인’의 면모로도 추앙받아왔다. 다음달 내한 공연을 앞둔 그는 최근 <한겨레>와 한 서면 인터뷰에서 “현대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또한 그저 말에 그쳐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전쟁은 중단돼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무관심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때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겨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애국심이란 이름의 집단 광기’, ‘집단 히스테리’라고 퍼부었다. 푸틴의 정적에게 자신의 음반을 헌정했고, 공연장에선 우크라이나 작곡가들의 곡을 자주 연주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발트 3국’의 젊은 연주자들을 모아 1997년 창단한 ‘크레메라타 발티카’를 이끌고 내한 공연을 한다. 크레디아 제공
이번 내한 공연은 ‘크레메라타 발티카’와 함께한다. 크레머가 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의 젊은 연주자들을 모아 1997년에 만든 실내악단이다. 서울 예술의전당(9월2일) 공연은 ‘슈베르트 이후’란 주제 아래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에서 영감을 받은 현대 음악들을 연주한다. “클래식 레퍼토리를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거죠. 슈베르트 음악은 심오하고 영혼을 감동하게 해요. 관객들은 그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음악이 영혼을 채우도록 두면 됩니다.” 그는 “슈베르트 음악 자체가 이미 현대적이란 걸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라트비아 태생인 그는 10대 시절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보냈다. 20세기 최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로 꼽히는 다비트 오이스트라흐(1908~1974)가 스승이었다. 크레머는 과거 음악을 있는 그대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끝없이 영역을 넓혔고, 경계를 넘나들었다. 재즈와 탱고도 기피하지 않았다. “옛날 작곡가의 곡만 연주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능력이 예술가로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요.” 그가 이번에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새롭게 편곡해 연주하는 것도 이 연장선에 있다. 그는 “여러 양식과 악보, 시대를 이어주는 가교 구실을 원한다”며 “‘음악이 먼저’(Prima la Musica)가 내 평생의 슬로건”이라고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와 실내악단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오는 9월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연주를 들려준다. 크레디아 제공
그는 음악계 내부의 불합리한 관행에도 비타협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음악계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감, 스타 마케팅에 대한 혐오를 공개적으로 표출했다. 유럽의 유명한 음악페스티벌을 ‘그들만의 리그’로 치부하며 참여하지 않았다. “크레머는 예술가의 삶에 존재하는 더러운 타협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립을 긍지의 휘장처럼 두른 채 늘 다른 이들과 한 발짝 떨어져 있다.” 영국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노먼 러브렉트가 지난 4월 <더 크리틱>에 기고한 칼럼의 일부다.
이런 꼿꼿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크레머는 많은 바이올린 연주자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영국 음악전문지 <비비시(BBC) 뮤직 매거진>이 지난해 1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20명’을 발표했는데, 1위가 다비트 오이스트라흐, 2위가 야샤 하이페츠였고, 기돈 크레머가 6위였다. 10위권에서 생존 인물은 크레머가 유일했다. 사라 장, 르노 카퓌송, 레이 첸 등 저명한 현역 바이올리니스트 100명에게 설문을 돌린 결과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도 ‘현존하는 단 한명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 기돈 크레머를 꼽은 적이 있다.
그는 곧 ‘이시엠(ECM) 레이블’에서 새 음반을 발매한다고 소개했다. “타이틀이 ‘운명의 노래’예요. 독자들의 호기심을 높이기 위해 여기까지만 얘기할게요.”
임석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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