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김선욱이 지난 8월 광복절 음악회에서 서울시향을 지휘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피아니스트 김선욱(34)은 지난 7일 독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가던 차 안에서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서울시향 공연 담당 관계자였다. 서울시향 상임지휘자 오스모 벤스케를 대신해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는 송년 음악회를 책임져달라는 요청이었다. 핀란드에 머물던 벤스케가 전날 낙상으로 골반 골절상을 입어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거였다. 14일 첫 공연까지 1주일, 첫 리허설까지 불과 닷새를 앞둔 촉박한 시점이었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김선욱은 “일단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지난 13일 기자들과 만난 김선욱은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걸린 그 30분이 저의 34년 인생에서 가장 고심을 많이 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차를 돌렸고, 서울의 한 호텔로 돌아왔다. 이미 서울시향이 퀵서비스로 보낸 ‘합창’ 교향곡 총보(지휘자용 악보)가 도착해 있었다. “7일부터 11일까지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하루 15시간씩 악보 분석에 매달렸어요. 자발적 격리였지요.”
전세계 주요 오케스트라들이 연말이면 ‘교향곡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베토벤의 ‘합창’을 연주한다. 관행처럼 굳어진 지 제법 됐다. 국내에서도 서울시향이 1948년 초연한 이래 수많은 악단이 송년 레퍼토리로 이 곡을 선택한다. 서울시향은 14~16일, 케이비에스(KBS) 교향악단은 23~24일 이 곡을 연주한다. 서울시향은 지난해에도 코로나19 탓에 수석 부지휘자 윌슨 응이 대타로 포디엄에 올랐다. 서울시향으로선 2년 연속 ‘대타’ 지휘자에게 ‘합창’ 지휘를 맡기는 셈이다.
대타를 제안한 서울시향에도, 이를 수락한 김선욱에게도 이번 공연은 ‘위태로운 승부수’다. 김선욱은 지휘를 시작한 지 2년밖에 되지 않는다. 지휘 경험으로 따지면 ‘초보’에 가깝다. 대규모 합창단과 함께하는 까다로운 이 곡을 연주해본 경험도 없다. 송년 음악회는 서울시향 정기 연주회 가운데 비중이 크고, 이미 지난 9월에 표가 동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김선욱으로선 잘하면 지휘 경력에 날개를 달게 되고, 그 반대라면 적잖이 타격을 입게 된다. 이는 서울시향에도 마찬가지다.
서울시향 상임지휘자 오스모 벤스케가 부상을 입으면서 대타로 나서 베토벤 ‘합창’ 교향곡을 지휘하게 된 피아니스트 김선욱. 그는 2년 전부터 지휘를 겸하고 있다. 서울시향 제공
“결국은 베토벤이잖아요.” 김선욱은 “피아노곡을 수없이 연주해 베토벤에 대한 생각과 해석은 이미 가지고 있다”며 “그걸 교향곡으로 옮기는 게 어렵거나 부담스럽게 생각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이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완주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 사중주, 교향곡은 모두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어요. 특정 악기를 위해 작곡을 한 게 아니라 자신이 가진 이상을 순간순간 음악으로 표현했기 때문이죠.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작곡했을 테니, 연주할 때도 항상 마음에서 우러나왔을 소리와 음향이라는 걸 생각해야 합니다. 이건 피아노를 칠 때든 교향곡 연주든 똑같아요.”
“더구나 ‘합창’ 교향곡이잖아요.” “‘합창’ 교향곡을 수백번은 들었다”는 그가 이 곡의 실연을 처음 들은 건 1999년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 예술의전당 제야 음악회에서였다. 지휘자를 꿈꾸던 초등학교 5학년 꼬마는 맨 앞줄에서 이 곡을 들으며 ‘언젠가 내게도 이 곡을 지휘하는 순간이 올까?’ 생각했다고 한다. “‘합창’은 상임지휘자가 아니면 하고 싶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공연이 아니에요. 오케스트라 규모도 그렇고, 수많은 사람의 노고가 들어가야 하거든요.” 악보를 들여다본 김선욱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악보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어요. 베토벤의 음악이 그래요. 음표가 주는 힘이 어마어마하죠. 3악장쯤 갈 때는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뜨거워지고, 쿡쿡 찌르고 그래요. 4악장에선 하늘에 있던 어떤 신성한 존재가 접속을 시도하는 느낌까지 들었어요. 정신이 혼미해졌지요.”
서울시향과 그는 오랜 인연이 있다. 어린 연주자들을 발굴하는 ‘서울소년소녀협주회’에서 생상스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을 연주했다. 12살 때였다. 2007년엔 지휘자 정명훈과 중국과 국내 투어를 펼쳤다. 그 뒤에도 유럽 투어를 서울시향과 함께했다. 물론 모두 피아노 협연이었다. 지난 8월 서울시향을 처음으로 지휘했다. “이런 시간이 주는 저와 단원들의 신뢰가 있었지요. 그래서 제게 이번 합창 지휘를 요청해주신 것으로 생각해요.” 이틀간의 리허설을 마친 김선욱은 “현재까지 순항 중”이라며 “뭔가 신선하다고 해주신 단원들도 있다”고 전했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2년 전부터 지휘를 겸하고 있다.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의 길로 들어선 정명훈이 그에게 해준 조언은 “시간이 걸린다”는 한마디였다. Marco Borggreve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의 길로 들어선 정명훈이 지휘에 관해 김선욱에게 해준 조언이 있다. “시간이 걸린다”는 딱 한마디였다. 정명훈이 지휘를 배운 명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로부터 들은 고언이기도 하다. “결국 음악가는 본인이 어떤 음악을 지니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해요. 평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갑자기 지휘하게 됐지만 후회 없이 준비했습니다.”
수많은 명지휘자들이 ‘주전’이 나올 수 없는 순간 ‘대타’로 나서 스타로 성장했다.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아챈 이들이 결국 성공한 지휘자 반열에 올랐다. 2006년 영국 리즈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명지휘자로 우뚝 올라설 수 있을까. 이번 3차례의 베토벤 ‘합창’ 교향곡 지휘는 그의 음악 인생에 있어 중대한 갈림길이 될 것 같다.
임석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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