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 쏘아올리던 그 공간에 서다
5월14일부터 로댕갤러리
5월14일부터 로댕갤러리
2004년 요절한 작가 박이소의 설치작품들은 로댕의 기념비적 조각 앞에서 마냥 어색하고 후줄근하게 서있었다. 작품으로 보기도 민망한, 헐거운 골판지 상자로 엮은 높이 4~ 정도의 탑 구조물들이 ‘맞장을 떴다’. 작품 제목은 <광명쇼핑센터>다. 그 위에 달린 10개의 조명등이 환한 빛을 전시장에 하릴없이 내쏘았다. 그 옆에는 철근과 철사망에 얼기설기 콘크리트를 채워넣은 볼품없는 배가 있다. 한눈에 부시시하고 조잡해 보이는 구조물들은 볼수록 묘한 공감을 부른다. 서양 것, 근대문명이라면 항상 주눅들었던 우리가 얼기설기 만들었던 20세기 문화와 구조물들이 그런 얼개가 아니었던가.
5월14일까지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열리는 박이소의 추모 유작전 ‘불가능한 순례’는 뒤처진 근대화를 겪은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기묘한 영감과 후진 패러독스에 바탕한다. 고인의 친구였던 기획자 이영철씨가 꾸린 전시는 가장 냉혹한 언어로 한국의 문화정체성을 캐어낸, 작가를 추억한다.
‘그의 등장은 사건’이었다는 이씨의 회고처럼 박이소는 90년대 ‘박모’란 필명으로 국내 미술판에 포스트모던 예술론을 소개하고, 냉소적 개념미술의 유행을 흩뿌렸다. 전통과 이념 속에 묻혀 감성을 내지르는데만 능했던 한국 미술판에서 후발 근대, 난민국가의 후줄근하고 구슬픈 정체성을 처음 읽어냈던 작가가 그다. 2년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에 물통 바닥에 뜬 각목 구조물로 비엔날레의 공허성을 냉소했던 그는 세계 평단의 무관심에 좌절을 맛보았고, 반년 뒤인 2004년 4월 청담동 작업실 소파에 파묻힌 채 숨졌다. 46살의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전시장은 80년대 뉴욕시절 꾸민 ‘마이너 인저리’란 대안공간의 여러 스케치와 활동자료을 비롯해 84년부터 타계 때까지의 주요 설치·평면 작업을 망라한다. 전시벽을 넘어뜨리고 위에 하늘 동영상을 펼친 <오늘>, 낙하산에 매단 비디오로 흔들리는 지상 이미지를 담은 <팔라야바다> 등은 보는 눈 그대로 한국을 포함한 세계를 직시하려한 작가의 생각들을 펼쳐보인다. 동선이 끝날 무렵 각목받침대 위에 휘황한 조명이 벽면을 그냥 때리는 설치물 <당신의 밝은 미래>는 한국사회의 천박한 성공지상주의에 대한 질박한 냉소와 같다. 바싹 마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았던 박이소의 생전 태도와는 달리, 작품들 사이 동선에는 감상적 분위기가 넘쳐흐른다. 냉혹한 실존자로서의 작가상을 추구했던 고인의 내심과 사뭇 다르다. 기획자는 작품들을 잡다하게 늘어놓고, 일부는 기념비적 규모로 다듬는데 공을 들였다. 대안공간을 전전했던 그가 사후 1년여만에 제도권 최상층부 로댕 갤러리에서 대가로 떠받들어지게 된 건 허망한 아이러니다. 우리 미술판의 빈약한 지형도를 보여주는 방증일까. (02)2259-7781.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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