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압구정동 에스엠엔터테인먼트 본사에서 치뤄진 오디션. 아래쪽 왼쪽부터 가수 시절의 이수만, ‘동방신기,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의 양현석, ‘지누션’, 박진영, ‘비‘.
기획사 10돌 ‘대중음악계 산업혁명’ 그 이후
1995년 에스엠엔터테인먼트, 1996년 와이지엔터테인먼트(당시 현기획)가 문을 연다. 1997년 제이와이피엔터테인먼트(당시 태홍기획)가 뒤따른다. 이들의 출현은 대중음악계의 ‘산업혁명’이라 불릴 만했다. 스타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시대가 시작한 셈이다. 스타 기획과 발굴에서 매니지먼트까지 체계를 세운 이들 3대 기획사는 첫걸음을 뗀 지 10년 만에 한국음악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큰손으로 자랐다. 이도 모자라 외국 시장으로까지 영역을 확장해 가고 있다. SM 이수만·YG 양현석·JYP 박진영
한류 물꼬 튼 문화첨병 ‘훈장감’
세계로 내닫는 그들의 빛과 그늘… 이들이 싹을 뿌리거나 틔웠던 1996년은 10대 청소년 시장의 가능성을 명확하게 보여준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한 해다. 음반 시장도 거품으로 부풀어 올라 100만장을 팔아야 명함을 내밀 정도였던 때다. 당시 요요기획에서 일했던 이상철 현 와이지 이사는 이렇게 기억한다. “얼굴 좀 예쁘면 다섯 달 만에 앨범을 냈어요. 주먹구구식이었죠. 그뒤 10년 사이 그런 웬만한 기획사는 다 없어졌어요.” 이 들끓는 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살아남은 3대 기획사의 창업주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이수만(54·에스엠 이사), 박진영(34·제이와이피 이사), 양현석(36·와이지 대표) 이 셋은 인기를 몸소 경험했던 가수 출신이란 점이다. 대중의 취향을 낚아채는 더듬이를 갖춘 이들은 선진 캐스팅·매니지먼트 시스템을 받아들여 에초티, 에스이에스, 지누션, 세븐, 지오디 등 스타를 줄줄이 내놓았다. 무엇보다 한류는 이들의 훈장이다. 2001년 에스엠은 2년반 동안 훈련 끝에 보아를 일본에 진출시킨다. 지난달엔 제이와이피 소속 비가 미국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해 미국 시장 진출도 꿈같은 이야기만은 아님을 증명했다. 하지만 이들 기획사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만 있는 건 아니다. 논리적으로 인과가 분명하진 않지만 한국 대중음악의 주류가 상업성과 획일성에 휩쓸리는 원인을 이들에게서 찾는 목소리도 있다. 자금력과 홍보망을 갖춘 기획사가 장악한 판에 언더그라운드 창작가가 끼어드는 건 힘겹게 됐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는 “창작자의 개성에 따라 수준이 상향조정되는 게 아니라 기획으로 만들어져 상업적 완성도를 갖춘 가수들을 따라 음악의 질이 하향조정됐다”고 말했다. 어찌됐건 3대 기획사는 미국, 중국 등으로 시장 확장을 위해 달린다. 이들이 걸어온 10년이 바꾼 것과 이들이 꿈꾸는 미래는 무엇인지 알아봤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엔터테이너 ‘맞춤생산’ 아시아로 미국으로
신인 발굴·훈련·홍보 체계화
대중취향 맞는 인기상품 배출
해외진출 기반 개척 기성세대 맞선 저항 몸짓까지
상품화 도구로
10대 위주 상업성 너무 진해 에스엠엔터테인먼트, 와이지엔터테인먼트, 제이와이피엔터테인먼트. 3대 기획사 출현 이전엔 대중음악을 이끌어 가는 힘이 음악인의 창작 능력에서 나왔다면 이후엔 기업의 기획력이 그 자리를 꿰찼다. 인기가수 출신인 이수만(에스엠), 양현석(와이지), 박진영(제이와이피)은 대중의 문화 소비 방향을 발 빠르게 좇으며 엔터테이너를 ‘생산’해 냈다. 가장 또는 지나치게 대중적인=1996년 9월 에스엠엔터테인먼트의 ‘에초티’가 첫 앨범을 내놨다. 여덟달 앞서 서태지는 은퇴를 선언했다. ‘에초티’의 타이틀곡 ‘전사의 후예’는 멜로디나 보컬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따지자면 이 곡은 ‘교실이데아’처럼 기성세대에 직격탄을 날리는 도발적인 노랫말을 담고 있지 않다. 다만 저항적 몸짓을 상품화한 것이다.(<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이영미)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는 “제작자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10대 수요가 견고함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1998년 10월 제이와이피는 ‘지오디’의 ‘어머님께’를 선보였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자장면 하나에 우린 행복했어~”. 그들의 성공 배경에 대해 이영미는 이렇게 설명한다. “경제가 어려워지던 1997년 후반부터 10대 댄스음악과 소비지향적 분위기에 제동이 걸렸다… 이때 ‘지오디’는 공동체적 사랑을 강조하는 노래를 부른 것이다.” 정욱 제이와이피 이사는 “‘핑클’, ‘에스이에스’ 등의 전성기였는데 이들과 다른 아이돌 그룹을 지향했다”고 말했다. 1997년 6월 와이지(당시 엠에프 기획)가 키운 힙합듀오 ‘지누션’의 첫 앨범은 70만장이 팔려나가 이전 ‘킵식스’의 실패를 만회했다. 이상철 와이지 이사는 “힙합이 미국에서는 이미 인기를 끌고 있었다”며 “마니아층이 빠르게 확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고 말했다. 원석을 캐 ‘팔리는’ 장식으로 =홈런’ 친 기획을 뒷받침하는 건 체계화된 신인 발굴과 훈련 과정이다. 에스엠은 2000년부터 주말마다 공개오디션을 벌인다. 연기, 개그, 춤, 노래 등을 선보이려는 학생들이 방학 때는 매주 300~500명씩 모인다. ‘슈퍼주니어’의 김희철도 그 가운데 한명이었다. 온 나라를 돌며 6개월에 한번씩 벌이는 에스엠베스트 선발대회에서는 ‘동방신기’의 영웅재중이 ‘외모짱’으로, 유노윤호가 ‘댄스짱’으로 뽑혔다. 2001년 ‘에초티 차이나’라는 이름으로 벌인 중국 오디션에서 ‘슈퍼주니어’의 한경이 3천대 1을 뚫었다. 현재 에스엠 연습실엔 중국인을 포함해 20여명이 훈련을 받고 있다. 에스엠 쪽은 “처음엔 춤, 연기, 노래 등 두루 가르친 뒤 진로가 결정되면 전문적인 트레이너를 붙인다”고 설명했다. 외국어도 커리큘럼에서 빠지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길게는 6년 거쳐야 데뷔 기회를 얻게 된다. 제이와이피도 상황은 비슷하다. 올해엔 <에스비에스>와 손잡고 ‘슈퍼스타서바이벌’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서 예비스타를 걸러낸다. 지난해 비의 공연를 따라 미국 등 5개 나라에서 오디션을 열었다. 와이지는 오디션뿐만 아니라 ‘와이지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으로 클럽 등에서 입소문으로 실력이 알려진 음악인들을 데뷔시키고 있다. ‘45알피엠’, ‘스토니스컹크’ 등이 그들이다. 연습생의 재능을 포장하고 대중에게 알리는 방법은 여느 기업의 제조공정 못지 않게 체계가 잡혀 있다. 정창환 에스엠 이사는 “유행을 끄는 외국 음악을 훑고 자료를 만들어 어느 세대를 겨냥해 어떤 그룹을 만들 건지 분석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방식을 받아들인 에스엠은 미디어팀과 메니지먼트팀을 분리해 운영한다. 미디어팀 담당자들은 방송프로그램의 시청률과 특징·경향 등을 분석해 에스엠 소속 연예인들에게 알맞은 것들을 골라낸다. 메니지먼트팀과 데뷔 시점, 홍보 방식 등을 조율한다. 와이지도 기획실에서 가수 별로 그들을 홍보할 적당한 방식을 꼼꼼히 살핀다. 기획사 ‘엠보트’와 함께 발굴한 ‘빅마마’를 알릴 때는 큰 시상식 무대가 아니면 방송은 피했다. 이들이 노래 실력으로 승부하는 ‘대형 가수’라는 인상을 깊게 심어주기 위해서다. 와이지는 클럽 ‘엔비’를 운영하며 힙합을 즐기는 대중의 폭을 넓혀갔다. 한국 넘어 더 큰 시장으로=이런 기획 능력이 한류의 물꼬를 트는 데 큰 몫을 했다. 정창환 에스엠 이사는 “‘에초티’를 퍼포먼스에 강한 그룹으로 만든 것도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 시장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며 “1997년 방송국마다 앨범을 나눠주는 식으로 중국에 ‘에초티’를 알렸다”고 말했다. 2000년 2월에 에초티는 중국 베이징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이듬해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2년반 훈련을 받은 보아가 일본에서 싱글 <아이디:피스 비>로 데뷔했다. 이번엔 일본의 최대 엔터테인먼트 그룹 ‘에이벡스’와 에스엠이 합작한 결과였다. 현지 기업과의 제휴는 외국 진출의 성공 확률을 훌쩍 높였다. 와이지는 1999년 ‘원타임’과 ‘지누션’을 일본에 소개하려 했지만 마음 맞는 파트너가 없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4년 세븐이 일본에서 스타로 자리매김한 데는 ‘엑스 재팬’ 등의 소속사였던 일본 기획사 ‘언리미티드’도 한몫했다. 이와 달리 지난 2월 미국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가수 비가 공연할 수 있었던 건 박진영 이사(프로듀서)가 다져놓은 인맥과 뿌려놓은 홍보 덕이 컸다. 그는 2년 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엔젤레스에 ‘브리지엔터테인먼트’를 세웠다. 윌 스미스 등 유명 음악인에게 곡을 주며 프로듀서로서 바탕을 굳혔다. 산업적 성장의 짙은 그늘?=산업 차원에서 기획사들은 성장을 거듭했고 외국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와 맞물려 한국 대중음악의 질적 퇴보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높아갔다. 적어도 주류 대중음악은 10대 위주의 상업적 색깔로만 덧칠됐다는 것이다. 임진모는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존재로 자랐으면서 새롭고 위험 부담이 있는 음악을 시도하지 않는 건 비판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준흠은 “돈 버는 게 목적인 엔터테인먼트 기업한테 음악의 획일화에 대한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며 “다만 영·미나 일본처럼 인디음악을 위한 마케팅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고 공연이나 클럽 문화가 활성화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거대한 홍보망과 자본력을 지닌 기획사가 시장을 석권한다면 ‘언더’ 음악 창작자들의 활로는 거의 없는 셈”이라고 말했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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