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 신작 오페라 <일트로바토레> 연습 장면. (왼쪽부터) 연출 잔카를로 델 모나코, 테너 국윤종(만리코 역), 바리톤 이동환(루나 백작 역) 국립오페라단 제공
국립오페라단은 신작 <일 트로바토레>(6월 22~25일)의 관람 연령을 8살에서 14살로 올렸다고 최근 공지했다. “잔인한 묘사와 폭력적 장면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였다. 대체로 오페라 관람 연령은 취학 연령인 8살 이상이다. 국내에서 과거 이 작품을 공연할 때도 8살, 다음 달 10일까지 이 작품을 공연하는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 등급도 8살이다. 국립오페라단이 이미 발표한 관람 등급을 14살로 갑자기 올려야 했던 사정이 뭘까.
‘음유시인’이란 뜻의 이 작품은 베르디의 오페라 26편 중에서도 특히 인기가 높다. ‘대장간의 합창’을 비롯해 아름다운 아리아가 많아 이탈리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오페라다. 배경은 15세기 스페인. 어린 시절 헤어진 형제란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한 여인을 두고 다투는 루나 백작과 음유시인 만리코의 대결에 집시 여인 아주체나의 처절한 복수극이 더해진다.
관록의 연출가 잔카를로 델 모나코(80)는 ‘범죄가 만연한 현대 미국 도시’로 배경을 바꿨다. 백인 우월주의 조직과 다인종 이민자 집단 사이의 대결에 폭력과 살인, 마약 등 자극적 소재도 넣었다. 모나코는 “이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이기에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다”며 “멋지고 좋은 것들만 보여주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원작도 잔혹한 내용 아니냐”고 했다. 전설적 성악가 마리오 델 모나코의 아들인 그는 “한국에서 이미 여러 차례 공연된 작품이라 연출적인 차이를 두고자 했다”며 “오래된 이야기를 오늘날의 관객에 맞춰 현대적 스타일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에 국내에서 초연한 베르디 오페라 <아틸라>도 연출했다. 배경을 바꾸니 의상도 달라진다. 청바지에 후드를 입은 만리코 조직은 칼과 체인,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루나 백작 조직은 모두 가죽 재킷 차림이다.
이처럼 연출자의 새로운 해석을 덧붙인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오페라’가 국내에서도 대세로 잡아가고 있다. 독일어로 ‘발명된 어떤 것’을 뜻하는 레지테아터는 수백년 전 만들어진 오페라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기 위해 시대와 공간을 바꾸고, 인물과 캐릭터를 변형시킨다. 작곡가의 악보는 음표 하나 손댈 수 없지만 극의 설정은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게 되면서 오페라에서 연출가가 지휘자보다 더 큰 결정권을 행사하게 됐다. 현대 오페라가 ‘연출가의 시대’로 불리게 된 배경이다. 레지테아터의 유행으로 성악가 캐스팅에서도 노래 실력에 더해 연기력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게 됐다.
국내에서도 레지테아터 오페라 공연이 잦아지는 흐름이다. 서울오페라앙상블이 지난 2~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올린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무대는 18세기 스페인의 세비야가 아니라 21세기 아시아 가상의 항구도시 ‘케이(K)다. 가상화폐와 무기 밀매로 부를 축적한 돈 조반니와 그의 부하가 항만에 쌓인 컨테이너 박스들 사이를 거니는 설정이다. 장수동 예술감독은 “인간 심성의 근원을 파헤치는 드라마틱한 메시지가 현대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 주목했다”고 했다.
독일 만하임 오페라극장이 지난해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선보인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4부작에서 라인강의 세 요정은 마이크 들고 노래하는 걸그룹으로 변신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지난해 10월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선보인 독일 만하임 오페라극장 프로덕션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도 파격적 연출이었다. 1부 <라인의 황금>에서 라인 강의 세 요정은 마이크 들고 노래하는 걸그룹 차림이다. 무대도 스크린 영상과 피아노, 의자 등 상징적 소품에 현대적 의상으로 채웠다. 4부 <신들의 황혼> 마지막 장면에서 불타는 건 신들의 성 발할라가 아니라 극장이다. 연출가 요나 김은 “신들의 죽음뿐만 아니라 철학의 종말, 극장의 종말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고대 북유럽 신화가 원전인 바그너의 장대한 악극을 ‘오늘의 이야기’로 재해석하는 독일 오페라의 최신 흐름을 보여줬다.
지난 2021년 국립오페라단이 올린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도 레지테아터 연출이었다. 프랑스 연출가 아르노 베르나르는 나치의 핍박을 받는 유대인 지도자 삼손과 나치의 지령을 받고 유대인 사회로 잠입한 미녀 스파이 데릴라로 설정을 과감하게 바꿨다. 원작의 구약시대를 1930년대 히틀러의 나치 집권기로 변형한 것이다.
국립오페라단이 2021년 공연한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는 원작의 구약시대를 나치가 집권한 1930년대로 바꿨다. 국립오페라단 제공
새로움과 색다름을 중시하는 레지테아터 오페라에선 관객의 시선을 끌기 위해 폭력성, 선정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국립오페라단은 2016년 드보르자크의 <루살카> 국내 초연과 2017년 베르디의 <리골레토> 공연에서도 선정성을 이유로 등급을 14살로 올린 바 있다. 2019년에도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와 작곡가 바일의 협업으로 탄생한 오페라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을 국내 초연하면서 역시 등급을 올렸다. 그래도 성악가들이 수위 높은 노출 장면을 불사하는 국외 오페라 공연에 견줘 국내 오페라는 여전히 ‘점잖은’ 편이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국립오페라단이 새롭게 선보이는 베르디의 오페라 <일트로바토레> 공연포스터. 국립오페라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