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단의 발칙한 아이들’ 박세진·노재운 작품전
이미지는 디지털을 먹고 괴물로 변한다. 이른바 ‘디카’의 보급으로 디지털 문화가 대중화한 요즘 숱하게 인터넷 등에 나도는 현재·과거의 일상 사진이나 영상들이 진짜냐 가짜냐는 것은 더이상 문제도 안 된다. 중요한 건 이미지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계속 붙이는 새 의미들이다. 지금도 한국 사회를 분열로 몰아가는 족쇄인 분단이데올로기, 근대화, 세계화 등의 화두들 또한 이런 맥락에서 전혀 다른 의미로 태어날 수 있다. 화단의 ‘발칙한 아이들’로 통하는 박세진씨와 노재운씨의 근작전은 이 골치아픈 화두를 전혀 다른 얼개로 해체해 버리는 신세대 작가들의 이미지즘을 확대경처럼 보여준다. 판문점은 초현실주의 공간 2003년 아트스펙트럼 전을 통해 각광받았던 신예 박세진씨의 첫 개인전(4월7일까지 싸루비아 다방·02-733-0440)은 그가 고교시절 견학했던 판문점의 낯선 이미지들이 핵심적인 모티브가 된다. 90년대 중반부터 올해까지의 근작들은 구성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판문점의 북한 병사와 철모를 쓰고 망토를 입은 남한 경비병, 스산한 주변 풍경, 그리고 작가의 자화상들이 등장한다. 녹색 탁자, 복도와 열린 문 사이로 보는 푸른 바다, 혼돈 속에 빠져 방황하는 작가의 모습이 뛰어 달리는 북한병사와 망토입은 병사들의 모습과 뒤섞여 혼돈스럽게 투영된다. 상호를 적대시, 경계하는 시선들이 교차하는 판문점의 긴장된 분위기를 작가는 이념적 코드로 해석하지 않고 곧 우리 삶이 미지의 타자에게 저당잡혀 있다는 불안감에 바탕한 초현실주의적 구도로 풀어나간다. 회색조 혹은 창백한 블루톤 화면 속에 버무려진 판문점 이미지들은 난해하지만 강렬한 아름다움이 있다. 전시장에 내걸린 여러 그림들은 “총에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는 한 소녀의 즉물적인 판문점 견학기를 풀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분위기를 지배하는 망토 입은 남자의 모습은 계속 여러 그림에 등장하면서 분단, 작가의 분열적인 내면을 증언하는 화자가 된다. 오직 이미지와 지독한 개인적 감성만으로 분단 공간을 전혀 다르게 해체해 버린 작가의 공력이 돋보인다. 아쉬운 건 이런 그의 이미지 탐색이 일관성있게 갈무리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올해 그린 가장 큰 대작인 <울고있는 병사>에서 이 망토 병사는 철모를 벗어던지고 장미꽃에 둘러싸인 순정만화의 인물로 갑자기 변신하는데, 그 갑작스런 화두의 변화를 작가는 작품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이미지의 블랙홀을 만들다 서울 구기동 대안공간 풀에 차려진 작가 노재운씨의 개인전 ‘스위스의 검은 황금’(31일까지·02-396-4805)은 쿨하면서도 허망한 일상 이미지들의 해체 작업이다. 2004년 인사미술공간 전시에서 부산 아시안게임에 온 북한 응원단의 인터넷 이미지를 채집해 보여주었던 작가는 우리가 진지하게 바라보는 정치·사회적 현안, 이념에 얽힌 공간 이미지들을 가상 디지털 공간에서 끌어오면서 황당하고 낯선 코드로 바꿔 버린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폭격 작전을 떠나는 연인을 항구에서 전송하는 할리우드 영화 속 연인과 집중폭격의 대상이었던 북한 평양의 공중사진을 대비시킨 것이나, 폭격당한 이라크 바그다드의 화염을 아름다운 그래픽 디자인처럼 만들어 버린 것은 이미지 채집가인 작가의 의도를 단적으로 드러낸 부분이다. 컴퓨터 화면에 선보이는 웹작업 ‘집 4부작’은 영화의 점프컷을 떠올리게 한다. 북한과 한강을 두고 인접한 김포 애기봉 전망대 부근의 조잡한 가건물 공장과 한강 너머 북한 선전마을, 수십년 전 사라진 미국의 한 마을 모습 등을 번갈아 비춰주면서 가짜와 진짜가 뒤섞인 현대 시각문화의 현실, 환각과 향수로 아롱진 가상공간의 무망함 등을 이야기한다. 이 전시는 원래의 의미를 빨아들여 전혀 다른 의미를 뱉어내는 디지털 시대 이미지 유통의 블랙홀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백설의 나라 스위스와 석유를 뜻하는 검은 황금을 대비한 제목부터가 이런 맥락을 암시하는 것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