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2월, 대학생이던 이윤택은 밀린 대관료를 내지 않으려고 분장한 얼굴도 지우지 못한 채 부산시민회관 소극장 뒷문으로 도주했다. 그는 당시 <복 많은 의사 선생 스가나렐> 공연을 마치고 수입금 90만원을 기획자 최경식에게 주면서 스태프들에게 나눠주라고 한 뒤 도주했다. 그는 도주 직전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다들 무엇을 하든 살아 있으라. 우리 10년 후에 만나자”고 말했다.(<가마골연극4호> ‘우리는 이렇게 시작했다’ 중에서)
1986년, 이윤택은 멀쩡히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다시 연극을 시작했다. 13년 전 연극 동지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등단해 활동해온 그였지만 연극을 향한 열정은 불잉걸처럼 식지않았다. 그에게 연극은 시대로부터의 독립성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생전의 기형도가 기사를 쓰면서 나를 일컬어 ‘문화 무정부주의자’라고 했는데 정확한 표현이에요. ‘나에게는 또다른 정부가 있다’, 바로 연극이라는. 그게 제 신념이죠.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공간을 확보하며 사는 것, 그게 중요하죠.”
“나는 문화 무정부주의자” 밀양 연극촌 마련 ‘공동생활’
주말마다 수백명 관객 발길… 지역잔치 다니며 ‘삶의 공연’
연희단거리패는 부산 가마골 소극장, 서울 게릴라극장 말고도 지난 1999년 경남 밀양에 연극촌을 건설했다. 폐교된 초등학교 교사에서 집단 거주하며 운동장에 극장을 세웠다. 그의 소망대로 거대한 ‘연극 왕국’을 이룬 셈이다. 그곳에서 70여명의 단원과 가족이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하며 원시공산주의적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통영 봉평동 벚꽃 축제에서 <오구>를 공연해주고 1천만원을 받아요. 무안 고추 축제, 밀양 아리랑 축제도 참가하지요. 그렇게 번 돈으로 매달 10일 월급을 줍니다. 먹는 것 자는 것은 공동으로 해결하구요. 외부에서 돈을 벌어오면 20%를 뗍니다.”
밀양연극촌장 하용부(51)는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했다, 연희단거리패의 연극은 ‘삶의 연극’이다”라고 말했다. 인간문화재 68호 밀양 백중놀이 예능 보유자인 그는 1989년 ‘운명적으로’ 이윤택을 만난 뒤 줄곧 극단을 이끌고 있다. 이윤택이 예술감독으로서 교육 및 작품을 관장한다면 하용부는 촌장으로서 집안 살림과 대외 업무를 도맡아 한다.
“제가 36살 되던 해 부산 가마골 소극장에서 제자들과 함께 공연을 했어요. 그때 공연을 본 이윤택 선생이 제 공연을 보고 ‘아, 저 몸짓이야말로 연극적인 것’이라면서, ‘다음에 작업 한번 같이 하입시다’하는 거에요. 그때부터 제의 2인생이 시작된 거죠.”
주말이면 공연을 보러 연극촌을 찾는 사람들이 150~200명 가량 된다. 동호회원들은 음식을 싸들고 와서 배우들과 함께 먹기도 한다. 하씨는 “연극하고 무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밀양 가면 작품도 볼 수 있고, 쉴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는 그런 꿈 같은 고장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윤택은 앞으로 밀양에 남아 배우 훈련과 극작, 책자 발간 등을 주로 할 계획이다. 5월19일부터는 명륜동에 새로 짓고 있는 게릴라극장에서 20주년 기념공연으로 <바보각시>를 다시 올린다. <바보각시>는 신촌 산울림 극장 근처 월세 30만원짜리 방에서 수십명의 단원들과 함께 전기담요를 깔고 생활했던 가장 어려운 시절의 작품이다. 가을에는 그가 연극의 스승으로 삼고 있는 브레히트 원작의 <억척 어멈과 그의 자식들>을 공연할 계획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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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연희단거리패’ 배우 오달수 “연기가 일상되는 삶 만들어줬죠”
영화 <올드보이> <음란서생> 연극 <오구>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등 출연
얼마전 오래간만에 부산엘 갔습니다. 부모님도 찾아뵙고, 집 주변에 새로 단장한 태종대 등대도 둘러보았습니다. 봄바람에 실려오는 바닷냄새를 맡으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엔 친구 사무실로 놀러도 갔습니다. 중앙동에 있는. 중앙동…. 중앙동 네거리의 삼 층 건물. 붉은 벽돌에 자세히, 자세히 귀 기울여 보면, 꼭대기 층에서 악(樂)을 치고, 춤을 추며, 소리하는 굿판이 한창입니다. 관객들은 흥이 나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은홍이 형은 무당 석출역을 맡아 신명나게 장고를 두드리고, 동갑인 미정이는 노모 역할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그 옆 화투판엔 문상객들이 티격태격. 희철씨, 원식씨 그리고 어쩔줄 모르고 속으로 몇 줄 안 되는 대사를 되뇌이고 있는 나.
1990년 연극 <오구> 초연 때의 기억입니다. 연희단 거리패에 입단한 지 근 일 년만에 무대에 섰을 땐 정말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빨리 공연이 끝났으면 싶었고, 이 공연이 끝나면 나에게 맞는 다른 직업도 알아볼 참이었고, 무엇보다 무대에서 너무나도 편안해보이는 저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고, 몇 작품을 하게 되고, 제법 고참단원이 되어갔습니다.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의 이중생이 되기도 하고, <바보각시>의 바보도 되었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연출도 해보고 연애도 하고. 드디어 연극이, 연기가 일상이 되는 삶을 얻기까지 십여년의 거리패 생활은 제 연기의 기본이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연희단거리패가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이윤택 선생님과 선배님들의 열정과 땀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성장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고생한 얘기 좀 들려달라고. 잠깐 생각하다가 다 잊었다고 얘기해 줬습니다. 어떻게 마음에 담고 사냐고….
중앙동 옛극장 앞에서 잠깐 생각에 빠졌다가, 친구 사무실 쪽으로 발길을 돌리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누군가 극장 앞 벤치에 앉아 따뜻한 봄 햇살 맞으며 정성스레 소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빙그레 웃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해 주었습니다. “고생스럽다고? 햇볕이 저렇게 따스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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