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강렬한 느낌 여전…섬뜩한 도발은 색 바래
한물 간 프린스(48)? 천만의 말씀이다. 마이클 잭슨과 함께 1980년대를 쥐락펴락 했던 그에 대한 예의 때문이 아니다. 최근 발매한 앨범 <3121>은 프린스의 음악 창작 능력이 녹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한다.
사실 그는 2004년 앨범 <뮤지콜로지>에서 이미 도약했다. 이번 앨범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솔, 아르앤비, 록, 펑크, 재즈 등을 최신 팝의 감각으로 버무렸다. 전자음과 마세오 파커의 색소폰이 깔끔하고 강렬한 리듬을 타는 ‘3121’부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쫀득하게 살아 있는 펑크 리듬(‘롤리타’, ‘겟 온 더 보트’)이나 느끼하지 않게 감미로운 발라드(‘테 아모 코라손’), 농도 짙은 솔(‘세티스파이’) 등도 빠지지 않는다. 타이틀곡 ‘블랙 스웻’에는 프린스 특유의 톡톡 끊는 미성이 멜로디를 거의 없애고 비트만 살린 음악과 어우러져 강렬한 느낌을 남긴다.
음악에서야 전성기의 프린스를 떠올려도 그다지 실망스럽지 않다. 하지만 섬뜩한 도발은 색이 바랬다. 한 몸에 남성과 여성, 흑인과 백인의 감성을 지닌 이 ‘섹스 심볼’은 더 이상 강요된 질서에 침을 뱉지 않는다. 공연에서 보여주듯 여전히 탄탄한 성적 긴장감을 유지하지만 위험 수위를 넘지 않는다.
마이클 잭슨이 제도권 안의 안전한 스타였다면 그는 위험한 반란자였다. 천재적인 창작능력과 요염한 자태로 그는 사회적 금기에 선전포고했다. 창작자로서 그의 재능을 확실히 펼쳐 보인 앨범 <더티 마인드>(1980) 재킷에 그는 끈팬티를 입고 몸을 드러냈다. 이 앨범에 담긴 ‘헤드’, ‘시스터’는 성적 에너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근친상간 욕망까지 암시했다. <러브 섹시>(1989) 재킷에는 꽃을 배경으로 알몸을 드러냈다.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연주에서 작곡까지, 못하는 게 없는 재간꾼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솔에 전자음을 버무려 등장했다. 그는 록, 재즈 등 온갖 장르를 가지고 놀며 때론 설익은 실험들도 마다하지 않았다. ‘웬 도브스 크라이’ 등을 담은 앨범 <퍼플 레인>(1984)으로 정상에 선 그는 <어라운드 더 월드 인 어 데이>(1985), <퍼레이드>(1986) 등을 내놓으며 80년대를 누렸다.
1990년대 들어 그의 몰락에 소속사인 워너브라더스와의 불화가 불을 댕겼다. 워너브라더스가 이익을 좇느라 자신의 앨범을 정기적으로 발매하지 않는다며 프린스는 투쟁을 선언했다. 아예 프린스라는 이름을 버리고 여성과 남성을 나타내는 기호로 표기하는가 하면 볼엔 ‘노예’라고 쓰고 다녔다. 밴드 ‘뉴파워제너레이션’이 참여한 이 시절의 앨범은 80년대의 복사판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소속사를 비엠지로 옮긴 뒤 그는 시디 세 장짜리 앨범 <이맨서페이션(해방)>을 내고 자축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우왕좌왕했다. 재즈를 파고 든 <더 레인보우 칠드런>(2001)까지 대중적인 취향과는 사뭇 동떨어진 실험을 담았고 대중은 그를 잊어갔다.
프린스는 모순적이다. 미국 미네소타주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지만 보수적인 가치 전체를 거부했다. 가장 야한 노래를 담은 앨범에 신에 대한 사랑도 실었다. 그리고 지금은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다. ‘도발’이나 ‘전복’이라는 이미지도 폭이 좁아 그를 다 담을 수 없어 보인다. 프린스는 그저 넘치는 창작욕을 주체 못해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는 그 자신일 뿐인 듯하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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