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가난한 가수들 ‘둥지’
관객 50여명 그 시절 떠올리며
‘불행아’ ‘뭉게구름’ 합창
관객 50여명 그 시절 떠올리며
‘불행아’ ‘뭉게구름’ 합창
김의철·이정선 지난달 30일 ‘해바라기홀’ 콘서트
1973년 4월 어느 날, 포크 음악을 하던 20살의 더벅머리 청년 김의철은 공연 장소를 찾아 헤매다가 당시 명동 가톨릭 여학생회관의 콜레트 누아르 수녀를 찾아갔다. 회관의 자투리 공간이라도 쓸 수 있는지 물어보는 김씨에게 프랑스에서 온 벽안의 수녀는 “얼마든지 쓰라”고 화답했다.
이후 가톨릭 여학생회관의 한 방은 ‘해바라기홀’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70년대 가난한 포크 가수들의 보금자리이자, 유일한 공연장으로 자리잡았다. 이정선, 한영애, 김영미, 이광조, 이주호 등 수많은 포크 가수들이 토요일마다 이곳에서 열리는 공연을 통해 배출되었다.
이들 중 맏형뻘인 김의철씨와 이정선씨가 지난달 30일 이곳에서 합동콘서트를 열었다. 근 30년 만의 일이다. 약 20여평의 자그마한 공간에 관객은 단출하게 50여명. 엄마를 따라온 10대부터 초로의 신사까지 다양한 관객들이 온돌방에 방석을 깔고 자리잡았다.
먼저 무대에 오른 김의철씨는 “감회가 깊다”고 첫마디를 꺼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만들었다는 ‘연인’이라는 곡에 이어 ‘해바라기’ ‘불행아’ ‘군중의 함성’ 등을 불렀다. 김씨는 “우리 모임의 주제가였던 ‘해바라기’는 당시 소련의 국화였다는 이유로 제재를 받아서 처음 두어번 부르고 못 불렀던 노래”라고 소개했다. 이어서 실향민인 부모님의 이야기가 얽힌 ‘강매’와 ‘망향가’를 눈시울 붉히며 부른 김씨는 마지막으로 누아르 수녀에게 보내는 노래라며 ‘감사합니다’란 노래를 불렀다. 그는 “처음에 공간을 써도 된다고 말을 들었을 때 너무 기뻐서 즉석에서 만들었던 노래”라고 소개했다.
70년대 김의철씨의 뒤를 이어 해바라기 모임을 이끌었던 이정선씨는 이날도 김씨 다음에 무대에 올랐다. 그는 “어찌어찌하다 보니 30년 만에 이곳에 섰다”며 “감개가 무량하다”고 말했다. 특유의 편안한 재담으로 관객과 대화한 이씨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당시에 입장료를 커피 한잔 값에 맞춰서 30원으로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산사람’ ‘항구의 밤’ ‘봄’ ‘뭉게구름’ 등을 불렀다. 동덕여대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중인 이씨는 “얼마 전 학부생 하나가 와서 ‘선생님 옛날에 가수였다면서요?’라고 묻더라”면서 웃었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관객 몇몇은 눈을 감고 방석 위로 몸을 좌우로 흔들면서 박자를 맞췄다. 몇몇은 어느새 벽에 기대어 편하게 자리잡았다. ‘저 하늘의 구름 따라’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불행아’나 ‘봄’, ‘뭉게구름’ 같은 익숙한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는 방안에 나직한 코러스가 울려퍼졌다.
개별공연 이후 예정되었던 두 사람의 합동공연은 이씨의 건강 문제로 취소되어 관객들의 아쉬움을 샀다. 이날 공연에는 해바라기 모임에 장소를 주선해줬던 누아르 수녀도 자리했다. 공연 내내 관객 뒤편에서 자리잡고 미소를 보내던 누아르 수녀는 “마치 30년을 뛰어넘어서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이라고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공연은 포크 음악 집단 ‘청개구리’(www.folkfrog.com)에 의해 기획되었다. 2003년 결성된 이 모임은 달마다 소규모 포크 음악 공연을 열고 있다.
글 김기태 기자, 사진 이정아 기자
이정선(맨 왼쪽)과 김의철(맨 오른쪽)이 4월 30일 서울 명동 전진상회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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