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부시 반대 목소리 ‘선명’
데뷔 16년째 음악적 ‘순수’ 그대로
데뷔 16년째 음악적 ‘순수’ 그대로
8집 앨범 낸 록밴드 ‘펄 잼’
미국의 80년대가 마이클 잭슨으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팝 음악의 시기였다면, 90년대는 흔히 얼터너티브 록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얼터너티브 록은 당시 ‘엑스 세대’로 불리는 젊은이들의 박탈감과 분노를 대변하면서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시애틀 출신의 록 그룹인 ‘펄 잼’은 ‘너바나’와 함께 90년대 이 흐름을 이끈 쌍두마차였다. ‘너바나’가 리더인 커트 코베인이 자살하면서 도중하차했다면, ‘펄 잼’은 얼터너티브 록을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도 꾸준히, 그리고 외로이 지켜왔다.
이들이 의미심장한 제목의 8집 음반 〈펄 잼〉을 내놓았다. 첫 음반 이후 15년 만에 낸 음반에서 이들은 마치 자신들의 음악적 정체성을 다시 선언이라도 하려는 듯, 그룹 이름을 아예 음반 제목으로 전면 배치했다.
‘라이프 웨이스티드’, ‘세버드 핸드’ 등 13곡을 담고 있는 새 음반에서 펄 잼은 이라크 전쟁과 부시 행정부에 대한 반대의 메시지를 선명히 담았다. 발매 이후 모던 록 차트 1위에 올라선 ‘월드와이드 수어사이드’에서는 아침 신문에 난 이라크 전쟁 사망자의 사진을 보면서 “고통의 세상에서 깨어있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죠/ 전쟁이 세상을 지배할 때 깨어있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라고 노래한다.
음반의 다섯 번째 노래 ‘마커 인 더 샌드’에서는 “지금 양쪽에서 신의 이름으로 살인을 주장하는 자들/ 하지만 신은 없지... 찾을 수 없지”라면서 전쟁을 비꼬았다. 다른 곡들에서는 음울한 내면 세계를 노래하면서 언더그라운드적인 감수성을 담았다. “너의 머릿속에 집을 봤어/ 닫힌 문과 어지러워진 침대/ 치유받지 못한 상처들 (라이프 웨이스티드)”
이제 멤버 대부분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이 밴드는 새 음반에서도 음악적인 중심을 고집스럽게 유지했다. 새 음반에서도 특유의 포크의 감수성에 펑크적인 록의 색깔이 눈에 띈다. 굳이 7집 음반 〈라이엇 액트〉와 비교하자면, 4년 전 나온 7집이 아트록의 요소를 도입하면서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이끈 반면, 이번 음반은 상대적으로 가벼워진 느낌을 준다.
평론가 권범준은 이 음반평에서 “펄 잼 초기의 사운드를 떠올리게 해서 그런지 클래식의 느낌이 다분하다”며 “데뷔한 지 16년 된 베테랑 밴드가 음악에 대해 이렇게 순수함을 견지할 수 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평했다. 〈뉴욕타임스〉조차도 음반평의 첫머리를 “펄 잼에 관해서는 무언가 고집불통이면서 존경스러운 면모가 있다”고 시작하면서 “슈퍼스타의 자족적인 태도가 아니라, 본연의 자리에 있음을 입증하고 싶은 한 밴드의 의욕과 솜씨를 가지고, 진지함을 전달한다”고 격찬했다. 펄 잼은 1991년 〈텐〉을 내놓으면서 데뷔했다. 너바나가 〈네버마인드〉를 발매하고 얼터너티브 록의 광풍을 예고한 직후였다. 펄 잼의 첫 음반은 약 2200만장이 팔리면서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뒤이어 93년과 94년에 연이어 내놓은 〈버수스〉와 〈바이탤로지〉 음반 역시 각각 1350만장과 950만장이 팔렸다. 국내에서는 너바나에 비해 적게 알려진 편이지만, 미국에서는 오히려 펄 잼이 대중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 작년 7월 〈유에스에이 투데이〉의 한 칼럼니스트가 인터넷 독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비공식 설문에서 펄 잼은 ‘에어로스미스’와 반 헤일런을 제치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밴드로 뽑히기도 했다.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펄 잼은 상업성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도 더 잘 알려졌는데, 이들은 뮤직비디오를 찍지 않고, 거대한 공연장 대신 대학교 교정 등에서 하는 소극장 공연을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94년에는 자신들의 콘서트 입장료로 20달러 이상을 받으려는 거대 티켓 판매회사와 마찰을 빚은 끝에 공연을 취소하기도 했다. 팀의 리더이자 보컬인 에디 베더는 미국 녹색당의 오랜 지지자였다가 지난 대선 때 민주당의 케리 후보를 지원하는 등 정당 정치에도 활발히 참여하는 편이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록 밴드의 가수가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하도록 책임을 떠안는 상황은 어처구니없지만 예술은 결국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고 거기에 (우리의) 책임이 있다”면서 자신의 행보를 설명했다. 베더는 진보적 사학자인 하워드 진과 교유하면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하워드 진 보스턴 대학교 명예교수는 최근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좌파들이 선명하고 일관되며 정서적인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오늘날 베더가 그나마 과거 밥 딜런과 존 바에즈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말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평론가 권범준은 이 음반평에서 “펄 잼 초기의 사운드를 떠올리게 해서 그런지 클래식의 느낌이 다분하다”며 “데뷔한 지 16년 된 베테랑 밴드가 음악에 대해 이렇게 순수함을 견지할 수 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평했다. 〈뉴욕타임스〉조차도 음반평의 첫머리를 “펄 잼에 관해서는 무언가 고집불통이면서 존경스러운 면모가 있다”고 시작하면서 “슈퍼스타의 자족적인 태도가 아니라, 본연의 자리에 있음을 입증하고 싶은 한 밴드의 의욕과 솜씨를 가지고, 진지함을 전달한다”고 격찬했다. 펄 잼은 1991년 〈텐〉을 내놓으면서 데뷔했다. 너바나가 〈네버마인드〉를 발매하고 얼터너티브 록의 광풍을 예고한 직후였다. 펄 잼의 첫 음반은 약 2200만장이 팔리면서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뒤이어 93년과 94년에 연이어 내놓은 〈버수스〉와 〈바이탤로지〉 음반 역시 각각 1350만장과 950만장이 팔렸다. 국내에서는 너바나에 비해 적게 알려진 편이지만, 미국에서는 오히려 펄 잼이 대중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다. 작년 7월 〈유에스에이 투데이〉의 한 칼럼니스트가 인터넷 독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비공식 설문에서 펄 잼은 ‘에어로스미스’와 반 헤일런을 제치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밴드로 뽑히기도 했다.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펄 잼은 상업성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으로도 더 잘 알려졌는데, 이들은 뮤직비디오를 찍지 않고, 거대한 공연장 대신 대학교 교정 등에서 하는 소극장 공연을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1994년에는 자신들의 콘서트 입장료로 20달러 이상을 받으려는 거대 티켓 판매회사와 마찰을 빚은 끝에 공연을 취소하기도 했다. 팀의 리더이자 보컬인 에디 베더는 미국 녹색당의 오랜 지지자였다가 지난 대선 때 민주당의 케리 후보를 지원하는 등 정당 정치에도 활발히 참여하는 편이다. 그는 최근 한 인터뷰에서 “록 밴드의 가수가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하도록 책임을 떠안는 상황은 어처구니없지만 예술은 결국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고 거기에 (우리의) 책임이 있다”면서 자신의 행보를 설명했다. 베더는 진보적 사학자인 하워드 진과 교유하면서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하워드 진 보스턴 대학교 명예교수는 최근 한 잡지와 인터뷰에서 “좌파들이 선명하고 일관되며 정서적인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오늘날 베더가 그나마 과거 밥 딜런과 존 바에즈와 같은 구실을 한다고 말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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