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현대 ‘아메리칸 퍼니’전
리히텐슈타인·웨슬리·크럼 작품
리히텐슈타인·웨슬리·크럼 작품
1960, 70년대 세계 미술계를 휘저은 미국 팝아트는 대중문화를 고급 시각예술의 영역에 끌어들인 첫 시도로 치켜올려지곤 한다. 그런데, 주요 팝아트 작가들은 기실 노련한 수완의 사업가들이기도 했다. 각종 광고나 상표, 일상품 등의 이미지를 되풀이하거나, 극사실적으로 화폭에 부각시키면 대중문화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부티나는 이미지가 생긴다는 사실을 그들은 직감했다. 이런 도발이 컬렉터와 평단에 먹히고 반향을 일으키면서 신화가 되었고, 부와 명예가 뒤따랐다. 수프 깡통이나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지겹도록 석판화에 찍어댄 ‘까불이 작가’ 앤디 워홀의 신화가 그랬다. 고급미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물겠다는 팝아트는 역설적으로 또다른 고급예술의 위계 질서를 만드는 데 기여한 셈이다.
갤러리 현대의 기획전 ‘아메리칸 퍼니’에서 이 미국 팝아트의 본질과 속성을 대표작가 3명의 작업을 통해 느껴볼 수 있다. 대중문화의 총아인 만화를 화두로 뽑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팝아트의 대표작가인 리히텐슈타인, 존 웨슬리, 로버트 크럼의 작업이 나왔는데, 하위예술인 만화의 신속한 선과 강렬한 표현 어법을 그들의 기민한 손맛을 통해 다른 맥락으로 창출해낸 흔적들이 보인다.
망점 가득한 원색의 실내풍경과 화폭 뒤의 뼈대 등을 묘사한 리히텐슈타인의 그림들은 만화 이미지를 크게 확대해 미디어사회의 명암을 보여주는 작업들이다. 사실 너무 자주 나와 식상감이 드는 리히텐슈타인보다도 훨씬 감칠맛나는 작가는 웨슬리다. 만화의 단순 유치한 선으로 가장 미국적인 공간이나 상징물의 일부분을 암시적으로 재해석한 그림들이 묘한 쾌감과 상상력을 일으킨다. 연인들의 섹스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육감적인 인물들 실루엣은 고감도의 에로틱 풍경이며 반복되는 아기, 물고기 등의 이미지, 홍수에 질척거리는 엉클샘 독수리 등은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크럼의 작업은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선으로 남녀 사이의 섹스와 동성애, 반전 문제 등을 까발리듯 이야기하는 만화다. 팝아트 작가에게서 보기 힘든 강한 풍자성과 컬컬한 해학, 비판의식을 겸비한 그의 서사적 작업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팝아트의 영향이 생각 이상으로 다양한 갈래를 통해 뻗어나갔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31일까지. (02)734-6111~3.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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