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 경계 없앤 결론 튀지만 어리다
2003년, 젊은 극단 수(秀)가 창단 공연으로 올렸던 〈나생문〉(연출 구태환)이 개작을 거치면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또 공연되고 있다. 올해는 특히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최광일·장영남 등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여 관객의 기대를 높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나생문〉(라쇼몽)은 일본 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의 1950년 작품이다. 단명했던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라쇼몽〉(1915)과 〈숲 속에서〉(덤불 속·1922)를 합쳐 만든 영화다. 길을 가던 무사 부부에게 가해진 산적의 폭력에 대한 산적과 무사, 그의 부인의 서로 다른 진술을 그림으로써 근대가 찾는 진실의 빛에 대한 확신의 동요를 표현한 이 소설들을 영화로 재구성함으로써 구로자와 아키라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인들이 가진 허위의식, 죄의식과 피해의식을 오롯이 드러냈다.
인물들은 무너져 가는 나생문 앞에서, 숲 속에서 일어난 범죄를 둘러싼 3인의 엇갈린 진술을 되새긴다. 볼프강 보르헤르트가 패전 후 독일인의 절망적 상태를 그렸던 〈문 밖에서〉(1947)처럼 문 밖은 추방된 자아의 상태다. 그리고 숲 속은 우리 무의식 속과 같다. 자기 확신을 잃은 인물들이 인간 무의식의 비밀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극단 수의 연출가 구태환은 이 유명하면서도 잊혀져가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무대로 불러내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그는 소설과 영화 〈나생문〉의 인물들을 훨씬 구체적인 배경을 가진 인물로 변화시킨다. 스트린드베리가 〈줄리 양〉에서 표현한 방식의 신분 상승 욕구가 이 연극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배경 삼아 앞의 세 에피소드보다 훨씬 발랄하게 구성된 제4의 에피소드가 연극을 희극으로 변화시킨다.
제3의 진술까지는 아키라의 영화와 거의 같은 톤이다. 그러나 나무꾼에 의한 제4의 진술에 이르면 3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평범하고 비겁한 사람들로 추락한다. 연극은 비극적 사건의 코믹 버전으로, 죽음은 해프닝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이제 관객은 각자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그저 웃으면 된다. 그리고 사건에 대한 의문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넘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거 따져 뭐하겠냐”는 것으로 바뀐다. “인간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냐?”라는 식의 통통 튀는 결론, 신세대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난받지 않는 의사표현 방식이다. 특정한 권위나 진지한 의도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우습게 여기려는 경향은 최근 더 강화되고 있다.
분명 이 연극은 원작과 각색의 힘으로 관객들의 이야기에 대한 갈증을 풀어준다. 그러나 선과 악의 경계를 너무 쉽게 허물어뜨리는 우리 연극의 습성 또한 답습하고 있다. 그것이 이 연극이 아직 어리다고 생각되는 이유다.
노이정/연극평론가 voive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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