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민주화열기를 군홧발로 참혹하게 진압하고 ‘체육관 선거’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총 6억원을 들여 벌인 관제축제 ‘국풍81’. 작은 사진은 ‘바람이려오’로 국풍81 가요제에서 금상을 차지하며 스타로 떠오른 가수 이용.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60) ♪ ‘국풍81’과 이용
세기 말 ‘녹화사업’으로 탈바꿈하기 이전만 해도 서울 여의도공원은 거대한 잿빛 광장이었다. 1970년대 초 여의도 개발계획에 따라 조성된 이 공간의 원래 명칭은 5·16 광장, 이름부터 정치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곳에서 4반세기 전 사상 최대의 축제가 열렸다. 이름하여 ‘국풍(國風) 81’이다. 공교롭게도 이름이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말처럼, ‘관제 광장’에서 거대한 ‘관변 축제’가 열린 것이다.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한 ‘국풍81’은 1981년 5월28일부터 6월1일까지 5일간 열렸다. 전국 대학 194곳에서 동원된 학생 6천여명과 일반인 및 단체 7천여명이 출연하고 연인원 1천만 명의 관객이 어우러졌다는 사상 유례 없는 축제였다. 일시적으로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된 여의도광장은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로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국풍 81’은 흥행만이 아니라 개념과 내용 측면에서도 두드러지는 축제였다. 여러 지역의 탈춤, 농악, 굿, 차전놀이, 고싸움, 줄다리기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전통예술 마당이자 민속 대축전이었다. 볼거리와 즐길 거리와 먹거리가 지천으로 널린 이색적인 축제로 지금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국풍 81’은 ‘하수상하고 난데없는’ 축제였다. ‘잊고 있던 전통의 멋을 되새길 수 있었는데 관제 행사면 또 어떤가’라고 넘겨버리기엔 우선 시기가 너무 절묘했다. 광주의 민주화 열기를 군홧발로 참혹하게 진압한 지 정확히 1년 뒤이자, 12·12 쿠데타와 ‘체육관 선거’로 집권한 신군부의 제5공화국 출범 직후에 축제가 열렸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실제로 ‘국풍 81’은 허문도 당시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입안하고 총 6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경비를 쏟아부어 치러졌다. 전통과 정통성 없는 이들이 전통에 집착한다는 역설을 고려하면, 민속 대축전이란 테마 역시 선의로만 해석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국풍 81’은 화려한 축제를 통해 민심을 추스르고 여론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호도책이었다는 평가가 주로다. ‘국풍81’의 정치적 배경에 관한 좀더 자세한 사항은 문화방송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허문도와 국풍81’ 편(2005년 4월 10일 방영)을 참고하기 바란다.
정치적 의도로 열린 축제였기 때문일까. ‘국풍’은 단 한 해 열리고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국풍’에서 정치적 의도를 제외한다면, 그 후예에 해당하는 행사들은 20여 년이 지난 뒤 곳곳에 우후죽순 생겨나 지금도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각 지방정부에서 엄청난 예산을 배정해 해마다 치르는 지역축제들 말이다.
‘국풍 81’은 또한 대학생 가요제를 통해 가요계에 이용이란 스타 가수를 하나 남겼다. 이용은 ‘국풍 81’의 가요제에서 ‘바람이려오’로 금상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이후 이용은 ‘사랑과 행복 그리고 이별’ ‘서울’ ‘첫사랑이야’ 등을 히트시키며 80년대 초 정상의 인기를 구가했다. 업템포 곡에서나 발라드 곡에서 모두 절창을 자랑하는 이용은 ‘감상적인 송창식’ 쯤으로 비유할 만한 음색을 아낌없이 토해내며 수많은 여성팬들을 몰고 다녔다.
무엇보다 10월만 되면 어김없이 라디오와 라이브 카페에 울려 퍼지는 ‘잊혀진 계절’은 이용의 대표곡일 뿐 아니라 80년대의 대표곡 리스트에 빠짐없이 오르는 곡이다. 서정적이고 영롱한 피아노 선율에 이어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 하는 노래로 시작되는 ‘잊혀진 계절’은 80년대에 트렌드가 된 이른바 ‘팝 발라드’(피아노 반주가 특징적인)의 전범 중 하나가 되었다. ‘잊혀진 계절’의 엄청난 히트와 함께 시작된 이용의 전성기는 85년 급작스럽게 터진 추문으로 이용이 미국으로 건너가며 때 이르게 중단되었다. 한참 뒤 귀국하여 밤무대와 음반을 통해 끊임없이 재기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가 활동을 중단했던 세월은 레테의 강이 되어 있었고, 가요계의 유행은 그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이용의 좋았던 시절은 ‘잊혀진 계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용우/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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