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뒤 목청커진 근대여성에 대한
당대 남성작가들의 의식구조 보고서
당대 남성작가들의 의식구조 보고서
‘롭스 & 뭉크’ 판화전…두려움·공포·경멸의 여성상 98점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1863~1944)는 거칠게 일렁거리거나 소용돌이치는 선들의 물결 속에 100여년 전 근대 유럽 여성들의 얼굴과 몸뚱어리를 그렸다. 그의 판화 속에는 왜소한 남자들을 짓누르는 성서 속 살로메나 가슴을 풀어헤친 유령 같은 마돈나의 이미지들이 출몰한다. 섬뜩한 귀기를 잔뜩 풍기거나 창백한 낯빛에 억센 몸짓을 지닌 뭉크의 여성상은 고전주의 화가들의 정결한 비너스상을 조롱한다. 세기말의 퇴폐 분위기가 넘실대던 19세기말 20세기초 서구 화단에서 뭉크는 왜 이렇게 여성 이미지를 표현했을까.
지난 11일 덕수궁 미술관에서 개막한 ‘롭스 & 뭉크:남자와 여자’전(10월22일까지)은 두려움과 경멸의 시선으로 여성들을 바라보았던 근대기 유럽의 사회상, 의식구조에 대한 그림 보고서 격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불안과 공포’의 화가 뭉크의 판화들과, 당대 풍자적 삽화로 일세를 풍미한 벨기에의 일러스트 판화가 펠리시안 롭스(1833~98)의 작업들에서 근대 여성의 이미지들을 주로 솎아낸 판화 98점을 추렸다. 이들 작품을 ‘섹슈얼리티’ 나 ‘악녀’(팜파탈)의 코드로 읽어낸 것이다. 산업혁명 뒤 서구 남성들은 급격히 사회적 주체로 떠오른 여성들의 약진을 불안감 속에 응시하면서 남자를 파멸시키고 악덕을 퍼뜨리는 요부의 이미지로 여성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전시는 두 작가의 작업을 통해 당대 남성 작가들의 의식 속을 탐험하는 과정인 셈이다.
뭉크의 석판화와 동판화들은 잘 알려진 유화작품과 거의 비슷한 구도의 단색조 판화들이다. 어릴 적 모친과 누나를 일찍 여의고 여성에 대한 결핍감, 불안, 환멸 사이에서 평생 방황했던 작가의 강박적 내력을 읽게 해준다. 출품작들 도처에 여성에 대한 그만의 감각적 인상이 얼룩져 있다. 폐병으로 죽어가는 누나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듯한 〈병든 아이 1, 2〉와 가슴을 풀어헤친 채 퀭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대표작 〈마돈나〉(왼쪽 위), 침대 옆에 앉은 10대 소녀의 당혹스런 공포감을 표현한 〈사춘기〉, 여자가 얼싸 안은 남자 목덜미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알몸 여인이 엄숙한 신사들의 대열 사이를 걸어가는 〈골목길〉 등의 출품작들이 나왔다. 죽음과 잇닿는 여성적 매혹, 풍만하면서도 기괴하고 섬뜩한 그의 판화 속 여성들은 자세히 보면 날카로운 선들의 신경질적인 율동으로 가득하다.
롭스의 작품은 뭉크와 달리 아카데믹하게 정제된 풍자적 터치의 일러스트지만, 여성에 대한 묘사는 훨씬 외설적이고 악마적 양상을 띤다. 알몸을 드러낸 숱한 창부들과 십자가에 못박힌 사탄이 남근을 드러낸 채 여인을 목조르는 악마적 이미지들, 검은 모자와 장갑, 스타킹을 낀 여자가 젖가슴과 치부를 드러낸 채 돼지를 이끌고 산책하는 대표작 〈창부 정치가〉(왼쪽 아래) 등은 직설적으로 당대 여자와 성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을 겨냥한다.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두 사람의 작업은 산업혁명 뒤 새로운 존재로 각인된 여성에 대한 유럽 부르주아 사회의 태생적인 거부감, 당혹감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해운업자들이 만든 벨기에 트랜스페트롤재단의 아시아 순회전으로 구성된 전시다. (02)2022-0612.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롭스의 〈악녀들-돈 후안의 가장 아름다운 사랑〉(1884년·왼쪽)과 뭉크의 〈사춘기〉(1894년). 뭉크가 롭스의 영감을 받았다는 추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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