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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경숙이, 경숙아버지… ‘제멋대로’ 울아배

등록 2006-08-20 21:16

아버지 세대 ‘기형적 가족’ 그려
진짜 같은 경상도 사투리 실감
전쟁이 터졌다. 아배(김영필)는 피란 짐을 싸느라 경황이 없다. 어매(고수희)와 경숙이(주인영)가 덩달아 보따리를 싸자 아배는 버럭 소리를 지른다. 집이 전 재산이니 집이나 지키고 있으라고. 경숙이는 “아부지예 내는 아부지 없이 우예 살라고요”라고 매달리지만, 아배는 “깝깝한 년! 시간 없는데 자꾸 와 이라노? 니는 어매가 옆에 안 있나? 너희는 둘! 내는 쏠로! 진정 외로운 사람은 내다!”라고 우기며 홀로 떠난다.

박근형(43)의 신작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는 부초처럼 떠돌기만 하던 우리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며 제멋대로였던 아버지, 도무지 책임이란 건 모르고,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던 아버지.

“제 아버지가 경숙이 아버지 같은 분이었어요. 남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아프게 하는 걸 즐기는 것 같은. 왜 우리 아버지는 저렇게 떠다닐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제 누나 이름이 경숙이에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 세대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거죠.”

박근형의 연극은 항상 의표를 찌른다. 아버지의 기상천외한 행각도 그러려니와, 아버지가 형님으로 모신다며 집으로 데려온 꺽꺽이 삼춘(김상규),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자야(황영희)가 모두 한 가족이 되어 함께 살게 되는 것이다.

그는 “나하고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는, 과거가 분명치 않은 먼 친척이나 아버지의 친구 같은 분들이 집에서 같이 살거나 이웃이 돼서 왔다갔다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가족이라는 개념이 지금보다 훨씬 폭넓었다”고 말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기형적 형태의 가족”을 얘기하려 했다고 그는 덧붙였다.

박근형의 연극이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것은 상당부분 ‘구어체 대사’에서 비롯한다. 연습 과정에서 배우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대사를 존중하는 것도 “연극은 구어체여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 집필 단계에서부터, 그와 동고동락하는 극단 골목길 식구들을 염두에 둔다고 했다. 〈선착장에서〉(박근형 작·연출), 〈일주일〉(고연옥 작, 박근형 연출)에 이어 이번에도 경상도 사투리를 썼는데, 배우들이 진짜 대구 사람들인 것처럼 구사하는 사투리는 연극성을 한층 드높인다.

사실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몽환적인 이 연극은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이 될 것 같다. 연극이 끝난 뒤 주위를 둘러보면 훌쩍이며 눈가를 훔치는 젊은 관객들이 눈에 띈다. 부재했던, 혹은 부재한 아버지의 추억은 시대가 바뀌어도 계속되는 것일까? 아배의 주제곡 〈굳세어라 금순아〉가 텅 빈 무대를 채운다. 23~31일 혜화동 게릴라극장 (02)763-1268.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연출가 박근형은

박근형은 우리 연극계에서 귀한 존재다. 과감한 생략과 비약으로 대중들의 뒤통수를 후리는 기발한 능력의 연출가이기도 하고, 제대로 된 희곡을 써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박근형은 대학에 가지 않았다. 무작정 연극이 좋아 포스터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다. 연극판을 떠돌며 한해 100여편의 연극을 봤던 시절이다.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것은 극단76단의 연출가 기국서. 진보적이며 실험적이고 비판적이었던 극단76단에 입단하면서 그는 경이로운 지적 체험을 하게 된다.

대중 허 찌르는 기발함

그가 뭔가를 쓰고 싶다고 처음 느낀 것은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의 몽둥이에 스러져 갈 때, 그는 원전 그대로 공연하는 연극 〈춘향전〉을 보고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암울한 시대 앞에 비굴하게 침묵해선 안된다는 정의감이 그로 하여금 희곡을 쓰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첫 희곡이 〈춘향 1991〉. 학생운동 하는 이몽룡의 이야기다. 이후 〈지피족〉 〈대대손손〉 〈물속에서 숨쉬는 자 아무도 없다〉 등을 쓰고 연출했다. 1999년의 모든 연극상을 휩쓸었던 〈청춘예찬〉은 지금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입길에 오른다.

글 이재성 기자, 사진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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