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빠글·번쩍·시끌…미술관? 백화점? 난장판!

등록 2006-09-12 20:41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전’의 전시품들. 일민미술관 들머리에 들어선 반공소년 이승복, 유관순 열사의 동상(왼쪽)과 전시장 안에 차려진 쌈지 마켓의 판매장(오른쪽)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전’의 전시품들. 일민미술관 들머리에 들어선 반공소년 이승복, 유관순 열사의 동상(왼쪽)과 전시장 안에 차려진 쌈지 마켓의 판매장(오른쪽)
광화문 사거리 70년대 동상…전시장엔 유명작품 싸구려 범벅
“날조에 날림 더한 짬뽕문화” 초유 실험불구 시대감성과 거리
최정화씨 이색기획전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관공서가 밀집한 서울 세종로 광화문 네거리. 서울에서 가장 권위적인 공간이라는 이 거리가 요즘 ‘불온’한 공기로 술렁거린다.

8월 말부터 네거리 한쪽 일민미술관과 〈동아일보〉 새 사옥 사이 공터에는 1970년대 학교 교정을 점령했던 구닥다리 동상들이 뿌리째 뽑힌 모습으로 들어앉았다. 유관순 열사, 반공소년 이승복, 책읽는 소녀상 등이 난잡한 숫자와 스프레이에 뒤덮인 몸뚱어리로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세종로와 맞은편 이순신 장군 동상의 미관을 치받는 날선 풍경이다.

소쿠리 더미 설치물 앞에 선 연출자 최정화씨.
소쿠리 더미 설치물 앞에 선 연출자 최정화씨.

이 동상 퍼레이드는 바로 옆 일민미술관에서 지난 1일 개막한 기획전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 연출자인 작가 최정화(45)씨가 세종로 공간에 날린 ‘×침’이다. 미술관 전시장은 한술 더 뜬다. 보랏빛, 분홍빛 색깔로 벽을 칠한 1~3층 안에는 30여명의 유·무명 작가와 미술 관련 기관들이 낸 작품과 미대생, 일반인들의 조형물, 시장, 폐기장에서 가져온 일상용품, 심지어 훔쳐온 잡동사니 등이 백화점 진열장처럼 뒤섞여 있다. 빨간 털 두른 돼지저금통, 석고상, 모조 불상, 눈구멍에 지폐 다발 꽂힌 투명 해골 모형, 옹기, 채색 밥상, 도기인형 등이 널브러진 전시대를 작가 김경호씨의 역대 한국사의 영웅 사진들과 싸구려 샹들리에가 내려다본다. 댄 플래빈의 형광등, 도널드 저드의 미니멀 선반 같은 억대 조형물, 사진대가 배병우씨의 소나무 사진들도 싸구려 가구와 3만개 넘는 알록달록한 소쿠리 더미의 물결 속에 묻혔다. 1층엔 최정화 티셔츠, 최정화 트로피를 파는 수레도 있다. 장사에 초연한 미술관이 백화점으로 돌변하는 요지경이다.

날조에 날림을 더하면 완성이라는 최씨의 키치 예술론이 집약된 이 실험은 한국 미술사상 초유의 것이라 할 만하다. 흥미로운 건 이 초유의 실험 속에 새로운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전시는 내용과 형식 모두 역설의 범벅이다. 지난해 작가의 일민예술상 수상 기념전 성격이지만 출품작 속에서 그의 존재감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른 작가들과 대중의 작품, 공산품, 잡동사니들로 등록상표 최정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미술관도 망가질 수 있어’라고 이죽거리는 듯한 연출 또한 뜯어보면 짜깁기다. 2, 3층 창가의 바구니 설치물은 지난해 베니스비엔날레 출품작의 재판이며, 벽에 그림을 덕지덕지 붙인 2층의 딸림 전시실은 근세 유럽의 황실용 컬렉션을 패러디한 것이다. 전시장 구성도 쌈지길, W호텔 등 그의 인테리어 개념들을 빌려 표현했다. 다만 백화점답게 공간의 동선은 깔끔하다. 관객에게 당신의 마음이 미술이라고 ‘뻔대처럼’ 우겨대는 최정화씨의 난장판 예술은 깔끔한 티를 내는 미술관의 권위적 공간이라야 ‘필’이 꽂히고 힘이 살아나고 더욱 스펙터클해지는 것이다.

불가의 선승처럼 유명, 무명 작가들과 공산품으로 뒤발한 전시에서 최씨의 존재는 사멸해 버렸다. 다른 작가들을 들러리 삼아 그는 막후의 잔영과 그림자로 남았다.

전시 공간을 박물관으로 표방한 것은 현재 한국사회, 미술판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그의 작가적 위상과 더불어 그의 시선이 지닌 시대적 한계성을 적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대학로 살바, 가슴시각개발연구소 등을 만들며 한국 현대미술의 첨단을 후지게 노래하고 ‘주욱’ 달려갔던 그의 작업들은 2000년대를 지나면서 언제부턴가 전광석화처럼 변하는 시대 감성에 뒤처지는 조짐을 조금씩 보여 왔다. 된장녀, 명품족, 럭셔리풍, 웰빙 트렌드가 문화코드를 지배하는 지금 오색 소쿠리, 인형, 황금빛 ‘똥 트로피’ 같은 난민적이고 ‘빠글빠글’하고 ‘번쩍번쩍’한 팝아트적 감성은 ‘호기심 천국’은 될 수 있어도 현대미술의 최전선에 서기엔 다분히 나이가 들어 보인다.

이 잡탕 미술의 백화점에서 왠지 아련한 향수나 인류학적 박물관 분위기가 풍기는 것은 전시의 상당부분이 이미 지난 시절 정서에 바탕한 까닭인지도 모른다. 최씨가 급변하는 시각문화의 감수성 앞에서 이미지 장사꾼과 예술 놀이꾼의 경계를 어떻게 줄타기할지 짐작해보는 것이 전시를 곱씹는 묘미다.

평론가 강수미씨는 “미술관에서는 양순해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대중들에게 여전히 카타르시스를 주는 전시”라며 “그가 즐겨 표현해온 한국의 짬뽕문화, 키치 문화가 이미 한물간 트렌드로 바뀐 사실을 얼마나 작가가 직시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10월15일까지. (02)2020-2055.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일민미술관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