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희의 독집 앨범 최진희 [Golden Album: 물보라]. (킹/서라벌 SBK-0035, 1984.12.10.)
가수 최진희와 작곡가 김희갑의 만남
현재 우리가 ‘트로트 가수’라고 인식하고 있는 가수들이 “한때 팝송을 불렀다”라든가 “그룹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에 대해 신기할 필요가 없다. 얼마 전 종영한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왔던 밤무대 가수 리차드 권(임하룡)이 “내가 원래 팝송 부르다가 트로트로 바꾼 거잖아”라고 말한 것을 보면, 가수가 무대에서 어떤 노래를 부르는가는 그 무대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는 법이다.
지금은 성인가요계의 중견이 된 최진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라북도 이리 태생으로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한 그가 여성 보컬그룹 양떼들, 그룹 사운드 조커스 등에서 주로 팝송을 불렀다는 경력은 1970년대 말 ~ 1980년대 초 나이트클럽계의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이미지를 그릴 수 있다. 최진희가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를 넘어 <그대는 나의 인생>(KBS 드라마 주제가)이라는 신곡으로 방송과 음반을 통해 스타로 등극한 것은 1983년. <물보라>(MBC 드라마 주제가), <사랑의 미로>,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등이 라디오와 카페에서 줄창 흘러 나온 것은 1984~5년이다.
그 무렵 그의 히트곡들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가수 최진희’라는 이름 못지 않게 ‘작곡가 김희갑’이라는 이름이 중요하다. 미8군 쇼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김희갑은 자신의 밴드(악단)을 이끌면서 연주인 생활을 하는 한편, 1960년대 말부터 작곡가의 길을 걸으면서 1970년대 내내 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바닷가의 추억>(키 보이스), <달맞이꽃>(이용복), <상아의 노래>(송창식), <꽃순이를 아시나요>(김국환), <작은 연인들>(권태수) 등의 곡들을 기억한다면, 그의 작풍이 어떤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진희는 김희갑의 밴드에 객원 싱어로 스카웃되면서 팔자가 바뀐 셈이다. 그런데 김희갑의 밴드의 이름은? 오랜 동안 ‘김희갑 악단’이었다. 단, <그대는 나의 인생>이 수록된 앨범에는 한울타리라는 그룹(밴드)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사연을 설명하려면, 이 곡이 텔레비전 드라마 <청춘행진곡>의 주제곡이었다는 사실부터 언급해야 한다. ‘노주현·정윤희 주연’이자 ‘정윤희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록되는 작품이다. 요즘처럼 드라마 음악이 외주업체와의 계약을 통해 척척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부탁으로 이루어지던 때다.
아무튼 곡이 녹음되고 드라마에 삽입되면서 음반도 없는 노래가 히트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부랴부랴 음반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최진희가 아직 무명이라서 그룹의 이름을 내세웠는데 그때 급조한 이름이 ‘한울타리’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그대는 나의 인생>은 베이스 주자인 허영래와 최진희가 함께 불렀고, 앨범 수록곡에는 허영래 혼자 부른 트랙도 두 곡 들어 있으니 이 음반의 주인공이 ‘그룹 한울타리’라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다.
김희갑은 이 무렵 양희은의 재기작 <하얀 목련>(1984)을 히트시킨 뒤 천직처럼 생각했던 연주인 생활을 끝내는 한편 킹 레코드에서 지구레코드로 옮겨 전속 작곡가가 되었다. 이 무렵 그의 콤비도 바뀌었는데, 다름 아니라 드라마 작가 출신으로 그의 부인이 된 양인자다. 1985년부터 한동안 ‘양인자 작사·김희갑 작곡’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고, 조용필, 이선희, 임주리, 김국환 등이 그의 곡을 불러 히트곡의 수를 늘려 갔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한번 더 울궈 먹어야 할 테니 오늘은 생략.
최진희 역시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가수로서 성공적 경력을 이어갔고 많은 상복도 누렸다. 1980년대 말 이후에는 <카페에서> <외로운 여자> <가버린 당신> 등 성인가요로 스타일을 바꿔서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그의 노래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존재하는 어떤 카페에서 들어도 무난하게 어울리는 것이었고, 그래서 최진희의 테이프는 대도시의 말끔한 대형 소매상부터 고속도로 휴게소의 가판대까지 고루 깔려 있었고 소리소문 없이 쏠쏠하게 팔리는 아이템이었다. 이런 무난한 취향이 휴전선 이남의 현상만은 아닌 모양이다. 2000년 국가정보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남한 가요는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라고 밝혔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사랑의 미로’에서 헤매는 건 남한 민중이나 북한 민중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신현준/ 대중음악 평론가
최진희 역시 그 후로도 오랫동안 가수로서 성공적 경력을 이어갔고 많은 상복도 누렸다. 1980년대 말 이후에는 <카페에서> <외로운 여자> <가버린 당신> 등 성인가요로 스타일을 바꿔서 꾸준한 인기를 누렸다. 그의 노래는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존재하는 어떤 카페에서 들어도 무난하게 어울리는 것이었고, 그래서 최진희의 테이프는 대도시의 말끔한 대형 소매상부터 고속도로 휴게소의 가판대까지 고루 깔려 있었고 소리소문 없이 쏠쏠하게 팔리는 아이템이었다. 이런 무난한 취향이 휴전선 이남의 현상만은 아닌 모양이다. 2000년 국가정보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남한 가요는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라고 밝혔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사랑의 미로’에서 헤매는 건 남한 민중이나 북한 민중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신현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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