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69)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과 되찾은 도시의 서민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과 되찾은 도시의 서민
1983년 6월30일부터 11월4일까지 시청률 최고의 프로그램은? 불행히도 이렇게 질문을 던져 놓고 정확한 통계를 찾는데 실패하고 있지만, 추측컨대 KBS-TV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일 것이다. 한때 시청률 64%를 기록했다니 나의 추측이 많이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당초 2시간짜리로 시작된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이 뜨거워지면서 24시간 철야방송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도 기억이 새로울 것이다. 각설하고, 오늘의 주제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 한 명과 히트곡 한 곡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바로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박건호 작사·남국인 작곡)이다.
<잃어버린 30년>은 <아버님께>라는 제목으로 이미 녹음을 한번 했던 곡이고, 원래의 가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 바람이 부나 노를 젓는 우리 아버지 / 살을 에는 찬바람도 참고 견디며 / 한 평생을 보낸 낙동강…”. 그런데 갑자기 왜 이 곡이 ‘이산가족’을 다룬 주제곡이 되었던 것일까? 설운도 본인을 비롯하여 여러 명의 기억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날 설운도와 그의 매니저 안태섭이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고 있었다. →안태섭이 “이거다!”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작사가 박건호를 불렀다.→박건호가 밤을 새워 새로운 가사를 만들었다.→다음 날 스튜디오에서 5시간에 걸쳐 노래를 녹음했다. →KBS에 가서 녹음한 테이프를 전달했다 → PD 한 명이 이를 듣고 상부의 허가를 받아 이 곡을 방송했다. 그 결과 이 곡은 ‘최단 기간에 히트한 곡’으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돌아와요 부산항에>처럼 <잃어버린 30년>도 개사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은 곡의 또하나의 사례가 되었다.
그런데 설운도는 이 곡이 벼락 히트하기 1년 전인 1982년 KBS의 <신인탄생> 프로그램에서 연속 5주 우승을 차지해서 ‘스페셜 아워’의 주인공이 된 일이 있다. 훨씬 전인 1974년 의 지역 월말 결선(부산 ‘왕다방’ 개최)과 연말 결선에서도 수상한 경력도 있다. 1974년에 불렀던 곡이 홍민의 <석별>과 송창식의 <한번쯤>이었고, 1982년에 불렀던 곡들이 김동아의 <나를 두고 가려무나>, 박경희의 <저꽃 속에 찬란한 빛이>,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였다는 것을 보면, 그가 ‘처음부터 트로트 가수’는 아니었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명동의 ‘유토피아’, 남영동의 ‘니캉내캉’, 세운상가의 ‘아마존’ 같은 야간업소에서 활동할 때 설운도를 ‘김훈과 트리퍼스의 대타로 <나를 두고 아리랑>을 불렀던 가수’로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다. ‘가수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한’ 사람이 스타가 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고생에 대해서는 이런 짧은 글로는 턱없이 모자라겠지만.
<잃어버린 30년>은 너무나도 전형적인 형식의 ‘1960년대풍 엘레지’라서 가수의 개성을 표현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설운도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나침반>(김상길 작사·이유림 작곡)과 <마음이 울적해서>(정월하 작사·김정일 작곡)가 히트하면서 ‘슬프고 구성진 노래’와 연관된 이미지를 넘어설 수 있었다. 설운도가 트위스트, 차차차, 삼바 등의 리듬을 트로트 곡조와 뒤섞어 ‘트로트 싱어송라이터’의 독보적 존재가 되는 것은 1990년대 이후의 일이지만, 이미 이때부터 ‘장조의 경쾌한 리듬과 명랑한 곡조의 트로트’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트로트가 농촌적 감성을 벗어나 도회적 감성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당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게임 주최 등을 앞두고 국제적 메트로폴리스를 지향했던 서울을 ‘제2의 고향’을 삼고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트로트는 특유의 호소력을 이어나갔다. 특히 ‘종로’, ‘명동’, ‘청량리’, ‘을지로’, ‘미아리’, ‘영등포’가 연달아 등장하는 <나침반>의 가사는 1980년대 중반 서민들을 위한 여가의 공공 공간의 위치도를 정확히 그려주고 있다.
그런데 설운도가 <잃어버린 30년>과 <나침반>의 사이인 1984년 일본 고베로 건너가서 ‘블루 스카이’라는 업소에 출연하면서 피나는 노력을 통해 자기쇄신을 단행했다는 사실은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가수들에게 ‘일본’은 무슨 의미였을까. 1980년대 꽤 많은 한국 가수들이 일본에 건너가는데 이런 사례들에 대해서는 차근차근 알아 보자. ‘트로트=왜색’이라는 주장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일 문화교류의 숨겨진 역사에 대해 알아보는 차원에서….
신현준/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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