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컬렉션 대명사인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 전시실은 요즘 정원의 유자 향과 어우러진 추사의 묵향으로 차 있다. 1972년 첫 추사 전시 이래 미술관은 지금껏 7차례 추사 관련 기획전을 열면서 추사학 연구의 요람이 되어왔다. 올해 추사서거 150돌을 맞아 도처에서 기념전시와 행사로 법석을 떠는 지금, 과거 기획전의 인문적 성과를 담아 의연하게 준비한 간송 가족들의 가을 전시 ‘추사 150주기 기념전’은 차분한 격조와 품격이 배어 나온다.
특히 올해 전시는 추사 자신의 작품들 중심이던 이전 기획전과 달리 추사와 교유했던 선후학들과의 끈끈한 인연을 짐작하게 하는 유물들이 다수 나왔다.
최완수 연구실장을 비롯한 기획진이 전시장 첫머리에 스승 옹방강, 친구 권돈인과 후학 신위의 대작 행서 글씨를 걸었으며, 2층에 조희룡, 이하응(흥선대원군), 전기, 방희용, 조광진 등 추사 학풍을 배운 19세기 중인 후학들의 그림과 글씨 등을 놓은 것은 이런 의도에 따른 것으로 비친다.
숱하게 전시했던 추사의 명품들 또한 어김없이 한 자리를 차지한다. 글씨 고증을 위해 30여년간을 연구한 뒤 써낸 ‘침계’, 친구 초의 스님에게 써주었다는 ‘명선’ 글기운이 용암처럼 펄펄 튀는 ‘계산무진’(아래) 등이 맞는다. 암벽 같은 강건하고 힘찬 필체에 지고의 명언들을 줄줄이 적어넣은 예서 대련 6폭으로 채운 1층 전시장 안쪽 진열장은 이번 전시의 백미다. ‘그림의 법도에는 장강 만리가 들어 있고, 글씨의 기세는 외로운 소나무 한가지와 같다’는 대련 경구는 숱한 후대 문인들의 좌우명이 되기도 했다. 권돈인이 추사 사후 웅건한 필력으로 쓴 사당 현판용 글씨인 ‘추사영당’, 이한철, 고희동이 그린 추사 초상 등도 색다른 감회를 자아낸다.
2층에는 그와 교분 두터웠던 후대 학인들이 스승의 태산 같은 문예세계를 다양한 개성으로 돌파하려는 흔적들을 부려놓았다. 추사의 극찬을 받은 대원군의 진솔한 묵란도나 새치름한 파장이 전해오는 듯한 조희룡의 깔끔한 부채 난, 담백하고 간결한 김수철의 겨울 매화 괴석 그림, 스승의 파격을 본뜨려 했으나 어딘지 어색해 보이는 조광진의 대작 글씨 등이 보인다.
여기에 이번에 대거 공개된 추사의 난맹첩의 난초그림(맨 위)과 대표작 〈세한도〉와는 또다른 분위기의 아취를 풍기는 〈고사소요〉 등의 문인화가 발길을 다시 붙잡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한 해박한 지식과 옛 고문 금석문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동아시아 지성사에 추사학의 산맥을 일군 거장과 그의 자장 아래 놓였던 숱한 예인들의 주옥같은 발자취들이 2층 전시장에 아롱져 있다.
‘완당바람’이란 말처럼 추사는 한 개인의 발자취가 아니라 당대 수하 인맥들이 어울려 조선과 동아시아를 꿈틀거리게 했던 거대한 문화사적 흐름이자 파도였다는 사실을 간송의 기획진들은 전시를 통해 은연중 일러주고 있는 셈이다. 29일까지. (02)762-0442.
노형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