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
한국 팝의 사건·사고 60년 (80) 김민기와 노찾사
1982년 김민기는 경기도 전곡의 민통선 안에 둥지를 틀었다. 전곡에서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쌀농사 농민과 소비자를 직거래로 이어주는 출하사업을 벌여 성공했다. 시인 황명걸이 〈쌀장수 김민기〉란 시를 발표한 시절의 일이다. 하지만 김민기의 ‘쌀장수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3년 12월, 살던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그는 서울로 거처를 옮겨 다시 음악가로 돌아왔다.
대학가에서 김민기가 ‘이미 전설’이었다는 사실은 사족일 것이다. 1970년대 말 대학가에 생긴 노래서클들의 성원 역시 김민기의 음악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당시 노래서클들은 1980년 광주와 전두환 정부의 독재를 경험하며 노래의 본연과 사회성에 천착하며 ‘노래패’로 전화해갔다. 이들 노래서클의 1세대는 졸업 후 취업 대신 노래에 대한 고민과 궁리를 심화하고 실천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노래운동의 씨앗이 영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민기와 노래운동 1세대가 음반으로 다시 만났다. ‘다시’라고 표현한 건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연재 54회(6월 5일치)에서 언급했듯이, 1978년 김민기가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녹음할 때 몇몇 대학 노래서클을 보컬로 참여시켰고 그 녹음작업도 역시 이화여대 방송국에서 했다. 첫 번째 만남이 김민기의 음반으로 여물었다면, 이 두 번째 만남은 노래운동 1세대의 음반으로 영글었다. 두 번째 열매의 이름은 음반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이다.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노찾사 1집은 김민기가 프로듀서를 맡아 1984년 녹음한 것이다. 김민기는 원래 어린이 뮤지컬을 창작해 음반으로 내려 했는데 김민기의 작품이란 이유로 공연윤리심의위원회에서 접수조차 받지 않아 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음반을 준비하면서 규합했던 노래패 출신들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을 녹음하게 된 것이다.
이 음반은 흔히 ‘노찾사 1집’으로 불리지만 한편으로는 노찾사 1집이 아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란 그룹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 ‘노래를 찾는 사람들’은 음반 제목이었다. 노찾사가 실체가 되고 주체가 된 것은 1987년 공연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1989년 〈광야에서〉 〈솔아 푸르른 솔아〉 등이 담긴 〈노래를 찾는 사람들 2〉를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졌다는 얘기도 사족일 테고. 따라서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이 ‘우리가 알고 있는’ 노찾사의 특징적인 음악과 다소 다르다는 점은 자연스럽다. 이 음반은 민중가요의 전형적인 작풍과는 거리가 있고, 말 그대로 민중가요의 맹아를 풋풋하게 드러낸다. 싱그런 캠퍼스 포크송풍의 〈바람씽씽〉(한동헌 곡), 뒤에 〈퀴즈 아카데미〉에 배경음악으로 쓰여 인기를 얻은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김기수 곡), 김광석의 목소리로 잘 알려진 〈그루터기〉(한동헌 곡) 등은 1970년대 포크의 잔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계〉나 가곡풍 민중가요를 예감케 한다.(김광석은 이 음반에 참여해 노래하고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이 음반은 1984년에 만들었지만 불행히도 당국의 방해로 1987년에야 대중과 정식으로 만나게 되었고, 1989년 노찾사 2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뒤늦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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