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애의 1986년 공식 데뷔 음반
한국 팝의 사건·사고 (84) 1986년…한영애…혹은 슬픔이 터져 나온 해
들국화의 1집 음반이 발표된 것이 1985년 9월이고 한영애의 1집 음반이 발표된 것은 1986년 1월의 일이다. 이어서 시인과 촌장의 2집 음반은 1986년 7월, 어떤날의 1집 음반은 그해 12월에 나왔다. ‘1980년대 후반의 대중음악계를 풍요롭게 수놓았던 주옥같은 작품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음반들이다. 같은 기간 동안 세상의 모습은 어땠을까. 1985년 5월에는 ‘서울미국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이 있었고, 6월에는 ‘구로지역 연대파업 투쟁 사건’이 있었고, 11월에는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기습점거 사건’이 있었고, 1986년 5월에는 ‘인천 5·3 사건’이 있었고, 7월에는 ‘부천 성고문 사건’이 있었고, 10월에는 ‘건대 점거농성 사건’이 있었고, 1987년 1월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다.
대중음악계 사건과 사회운동권 사건을 병렬해 본 것은 두 가지 세계가 눈 앞에서 오버랩되는 경험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한국 사회에 엔트로피가 최고조로 달하던 시점 오랫동안 응어리져 있던 슬픔, 그리움, 아쉬움, 서러움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이는 대중음악계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 상징적 목소리를 두 개만 뽑으라면, (들국화의) 전인권과 한영애일 것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과 <행진>에서 전인권의 질러대는 목소리가 후련한 해소감을 안겨 주었다면, ‘포크송’인 <여울목>과 ‘블루스곡’ <건널 수 없는 강> 등에서 한영애의 목소리는 슬픔과 서러움을 머금은 상태 그 자체를 표현해 내었다.
한영애의 개인적 경력을 본다고 해도 이런 설명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한영애는 이미 1977년 이정선이 이끌던 혼성 4인조 보컬 그룹 해바라기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두 장의 음반을 발표했고, 솔로 음반도 두 장 발표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본인이 이 시기의 솔로 음반에 대해서는 거론하는 것조차 꺼리지만, 이는 역으로 그 시대는 ‘끼’를 발휘하고 ‘꿈’을 펼치기는 어림도 없는 시기였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오랜 시간의 방황과 고민은 그만큼의 준비로 이어졌고, 세상은 이에 대해 어느 정도 보상을 해 준 셈이다.
데뷔 음반 발표 이후 한영애는 신촌블루스에서 객원 보컬로 활동함과 동시에 솔로 활동을 병행했다. 1988년 발표한 솔로 2집 음반은 세상이 어느 정도 좋아진 것을 반영하는지 <누구 없소>, <루씰>, <코뿔소> 등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보다 자유로워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음반을 ‘한국 대중음악의 명반’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다소 뜸을 들인 뒤 1992년 발표한 3집 음반은 <말도 안 돼>와 <조율> 등 또다른 명곡들을 담았다. 이 무렵 연극배우 경력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공연은 충성스러운 고정팬들을 만들어 내었고, 1993년에 발표한 <1993 라이브 베스트 아우성(我.友.聲)>은 그에 관한 기록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386세대들을 위한 연예(좋은 의미에서)를 제공했던 셈이다.
그런데 한영애의 공연에 대해 “소극장 라이브 공연이 붐을 이루던 시기의 중요한 기록”이라고 쓰려고 하니 문득 1992~3년이 ‘신세대 댄스가요의 시작’이라는 판단과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기록을 뒤지니 한영애의 3집이 발표된 시점(1992년 3월 14일)과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음반이 발표된 시점은(1992년 3월 23일) 불과 9일이다. 1992~3년 한영애가 경력의 절정기에 있다고 간주할수록 이른바 386세대를 위한 연예는 서서히 아니 급속히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9일’의 간격은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되고 말았다.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