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만익 <주몽 천기를 잡다> 46 x 53cm, 캔버스 위에 유화, 2005년, 이미지 제공 세오갤러리 www. seogallery.com ⓒ 이만익
주몽의 눈빛이 날카롭다. 머리가 휘날리고 상반신을 앞으로 숙였으니,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다. 왼손에는 칼을 들고 오른손은 무언가를 움켜잡으려는 듯 말 고삐까지 놓은 모습이, 곧 말에서 뛰어내리며 눈 앞의 적을 낚아채 한바탕 격전을 치르려는 것 같다. 작품의 명제가 '주몽 천기를 잡다'이니, 고구려 건국 최대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순간의 모습이리라. 그런데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주몽이 '천기'를 잡는 장면은, 고구려 개국을 선포하거나, 용포를 입고 왕위에 오르는 장면이 걸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만익 화백이 그린 주몽은 '주몽 설화'에 근거한 모습이기 때문에, 그가 마지막 격전을 치루는 모습을 그렸다.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한 역사적 인물인 동시에, '주몽설화'에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주몽설화'는 <삼국유사>, <삼국사기>, <동국이상국집> 등에 수록되어있다.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늘의 신의 아들 해모수와 강물의 신 하백의 맏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이, 알에서 태어날때부터 갖은 장애와 난관을 극복한 후 고구려를 건국한다는 '영웅서사시'다.
이만익 화백이 주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부터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민족의 멋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작업을 했고, 그 그림들을 1980년 부터 <현대문학>에 ‘그림으로 보는 삼국유사’를 연재한 것이다. 따라서 위의 작품들은 설화 속에서의 청년 주몽과 그 영웅적 기개를 이만익 화백 특유의 평면적 기법을 통해 역동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유화자매도> 역시 '주몽설화'에 나오는 하백의 세딸 유화, 훤화, 위화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세자매는 강물의 신의 딸답게,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이는 압록강에서 유유히 악기를 불며 놀이를 즐긴다. 이를 본 해모수가 자식을 볼 생각으로 도술로써 궁궐을 만들고 세자매를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고, 세 자매가 술에 취하자 유화와 정을 통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만익 화백은 유화의 허벅지를 살짝 드러내 보였다. 하늘의 신의 아들인 해모수가 왜 그런 도술을 펼치고 유화와 정을 통했는지에 대한 화가의 '해석'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주몽 설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이 없으면 그려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보기 드믄 서사적 구조(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화가의 득의작이다. 그래서 화가는 이 작품을 작은 화폭이 아니라 가로 162cm 세로 112cm의 대형화폭에 그렸고, 이런 대작은 전시장에서 가서 볼 때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신화의 장면을 화폭에 옮겼고, 그 작품들 중에 '불후의 명작'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화가 중에서 우리나라 신화와 설화의 세계를 화폭에 옮겨담은 화가는 이만익 화백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고, 그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폭을 넓히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창조하는데 성공하였다.
<웅녀현신도>는 단군신화에 기초한 작품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웅녀는 단군의 어머니로, 하늘나라 임금 환인의 아들인 환웅이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천부인 3개를 받아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라 한 후,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과 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들을 주관하며 교화했다. 이때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이 되기를 원하자,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그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곰은 그것을 먹고 21일 만에 여자가 되었으나 호랑이는 참지 못하고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화백은 곰의 껍질을 벗은 웅녀에게 옷을 입히지 않은 아름나운 나체를 가진 여인으로 표현함으로써,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에 버금가는 우리나라의 비너스를 탄생시켰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남은 과제를 '세계적 보편성의 획득'이라 했는데, 이렇게 우리나라 고대신화와 설화 속에 있는 풍성한 이야기들을 한국적 감성으로 풀어냄으로써 그 목표를 실현시키려는지도 모른다. 가장 한국적인 작품이 가장 세계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만익 화백의 화가적 상상력은 설화의 세계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구수한 옛날 이야기도 화폭에 담았다. 위의 작품에서 그는 초가집과 제비 그리고 호박을 그림으로써 누가 보던지 '흥부네 가족'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화가는 집안에 조그만 전구로 불을 밝힘으로써, 이 작품이 옛날 이야기 속의 '흥부네 가족'이 아니라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는 이땅의 수많은 착한 '흥부네 가족'임을 나타냈다.
"세상이 급변하고 동서가 뒤섞인 때에 우리가 누구인지, 또 우리의 꿈과 이상, 우리의 현재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서양보다 가깝고 훈훈한 것, 때로는 나를 아프게 하고 분노하게 하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한과 기원이 담긴 우리의 얼굴을 그리고 싶었다." -작가 노트-
<모자도(눈오는 밤)>은 이화백의 여러 '모자도' 중에서 가장 원숙미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모자도'의 원형은 중세 유럽 화가들이 성모마리아가 아기 에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이화백은 우리나라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있는 정겨운 모습으로 그렸고, 창밖에 내리는 눈을 창문의 무늬처럼 표시하면서 방의 색을 우리나라 농촌을 상징하는 황토빛으로 처리하여, 시골정취를 나타냈다. 작품의 구도와 색상 그리고 장식물의 배치등 어디 흠잡을데 없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정겨운 모습이다. "회화의 특성이 평면적"이라는 이만익 화백의 '신념'에 충실하듯 원근법은 생략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민화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화백은 설화나 옛날이야기 뿐 아니라, 민화의 전통도 현대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철저히 '자기화' 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동심의 세계를 나타낸 그림답게 갈매기와 구름 그리고 바다 위의 배까지도 동화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그 표현이 '만화적'이거나 '삽화적'이 아니라 '회화적'으로 보이는 것은, 화가의 원숙한 필치와 품위있는 색상 사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붓질은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깊이가 있고, 그런 깊이가 있기에 '회화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붉은 노을이 산 봉우리를 덮을 때, 마을 앞 언덕에서 두 남녀가 사랑을 꿈꾸고 있다. 해가 저물자 해바라기는 고개를 숙였고, 하얀색 꽃봉우리들이 두 사람의 하얀색과 조화를 이루는 낭만과 서정이 가득한 작품이다. 두 사람의 얼굴을 평면적으로 단순하게 처리했지만 수줍음과 사랑의 안타까움이 절절히 표현되었고, 흰 옷을 통해서는 옛 모습의 정취가 떠오르니,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화가가 서구문화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우리만의 고유한 가치, 우리만의 각별한 심성과 원류"가 잘 나타난 또 한 점의 득의작으로, 가로 117cm의 대작이다.
이만익 화백은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화가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도'를 그렸다. 딸이 한명인 경우, 아들이 한명이 경우, 둘, 셋인 경우 등, 거의 모든 가정에 해당되는 '가족도'와 함께 부부만의 '가족도'도 그렸다. 그가 이렇게 '가족도'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 현실적으로 가족이나 모정 같은 의미가 약해지지만 우리가 꼭 살리고 옹호해야 할 가치하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작품을 보면, 비가 오는데 아이들과 아버지는 우산을 쓰고 있지만 어머니는 우산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으며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앞에서 가는게 아니라 어머니가 앞서 간다. 화가가 이렇게 그린 이유는 어쩌면, 어머니가 궂은 살림을 도맡아 하며 집안을 끌고가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산을 나뭇잎으로 그린 이유는 '인간과 자연과의 친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다.
판소리 한자락이 생각나는 서민적인 그림이다. 사실 우리 민족처럼 들판에 나가 춤을 추고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요즘에는 그런 풍경을 보기 쉽지 않지만, 불과 10-20년 전만해도 물 좋고 산좋은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당시에는 '없이 사는 사람'들의 거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이렇게 밥과 술을 싸들고 밖에 나가 한바탕 놀고 오는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가는 이런 놀이 문화 역시 우리 민족의 '각별한 심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하며, 가난한 가족의 나들이 모습을 화폭에 담았을 것이다.
이만익 화백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명성황후'다. 뮤지칼 명성황후의 포스터에 사용되어 많이 알려졌고, 이화백의 투철한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있는 작품이다. 칼 손잡이 위에 일본 국기를 그려 누구의 칼인지를 확실히 나타냈고, 수십개의 칼날이 명성황후를 향해 조여들고 있지만 품위를 잃지 않고 고개를 세운 채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우리 민족의 기개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기개있는 역사의식의 표현은 그가 '단군신화'부터 고구려 '주몽설화', 백제의 '정읍사', 신라의 '처용가', 고려의 '청산별곡', 조선시대의 '탈춤'등 우리역사의 모습들을 올곧게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왔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역사의식은 아래의 그림을 통해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꽃이 만발한 숲속에 남자아이들 끼리만 모여 노는 모습에서 우리나라 민화의 '백동자도'가 연상된다. '백동자도'는 조선시대에 남자아이의 출산과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로 그린 그림으로, 궁중화원과 민간
화가들이 8폭 병풍으로 그려 부녀자의 방에 놓았다. 그림의 내용은 남자아이들이 군인놀이를 하거나 재미있게 장난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화백은 '백동자도'의 이미지를 현대적으로 그리면서, 군인놀이 대신 화면 왼편에 부서진 탱크를 그려 넣었다. 살상무기와 전쟁이 사라진 땅에서 아이들이 즐겁게 놀기를 바라는 화가의 바램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 민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8,90년대 민중화가들이 부르짖던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까지를 화폭에 담았지만, 화가 이만익만이 그릴 수 있는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화가가 이렇게 자신이 원하는 작품세계를, 자신만의 독특한 필치로 표현할 수 있기 까지에는 무수한 실패와 좌절 그리고 외로움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그런 혹독한 세월을 이겨내며 올곧은 역사의식 속에 자신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완성시켰으니, 화가 이만익은 우리 현대미술사에 우뚝서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미지 설명 : 위의 작품들은 2005년 5월 19일부터 6월 30일까지 세오갤러리 <이만익 화백 초대전>에서 전시되었고, 이미지 사용허락을 받은 후 필자에 의해 색상 보정 과정을 거쳤습니다.
전시안내 : 위의 작품 중 일부는 올해 1월 4일부터 2월 28일까지 세오갤러리의 <이만익, 송번수, 백남준 전>에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세오 갤러리는 서울시 서초구 서초1동 꿈꾸는 세오빌딩에 있으며, 전화번호는 02-552-5618/9 입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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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 <주몽의 하늘> 160 x 300cm , 캔버스 위에 유화, 1991년, 이미지 출처 이만익 홈페이지 www. maniklee.com ⓒ 이만익

▲ 이만익 <유화자매도>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112 x 162cm, 캔버스 위에 유화, 2003, 이미지 제공 세오갤러리 ⓒ 이만익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만익 화백은 유화의 허벅지를 살짝 드러내 보였다. 하늘의 신의 아들인 해모수가 왜 그런 도술을 펼치고 유화와 정을 통했는지에 대한 화가의 '해석'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주몽 설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이 없으면 그려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보기 드믄 서사적 구조(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화가의 득의작이다. 그래서 화가는 이 작품을 작은 화폭이 아니라 가로 162cm 세로 112cm의 대형화폭에 그렸고, 이런 대작은 전시장에서 가서 볼 때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유럽에서는 오래전부터 신화의 장면을 화폭에 옮겼고, 그 작품들 중에 '불후의 명작'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 화가 중에서 우리나라 신화와 설화의 세계를 화폭에 옮겨담은 화가는 이만익 화백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고, 그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폭을 넓히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창조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만익 <웅녀현신도> 80 x 117cm, 캔버스 위에 유화, 2003년, 이미지 제공 세오갤러리 ⓒ 이만익

이만익 <가족도(고향집)> 46 x 53cm, 캔버스 위에 유화, 2005년, 이미지 제공 세오갤러리 ⓒ 이만익

이만익 <모자도 (눈오는 밤)> 46 x 53cm, 캔버스 위에 유화, 2005년, 이미지 제공 세오갤러리 ⓒ 이만익

이만익 <두친구(어린날의 추억)> 45 x 53cm, 캔버스 위에 유화, 2005년, 이미지 제공 세오갤러리 ⓒ 이만익

이만익 <그대와 나> 91 x 117cm, 캔버스 위에 유화, 2003년, 이미지 제공 세오갤러리 ⓒ 이만익

이만익 <귀로> 130 x 162cm, 캔버스 위에 유화, 2005년, 이미지 제공 세오갤러리, ⓒ 이만익

이만익 <가족나들이> 91 x 117cm, 캔버스 위에 유화, 2004년, 이미지 제공 세오갤러리 ⓒ 이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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