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노 마리니 〈기적〉
실존주의 거장 마리니 전
뭉툭 빚은 기마상
표정은 없고 존재감만
뭉툭 빚은 기마상
표정은 없고 존재감만
투박하게 툭툭 쳐 모양만 겨우 낸 듯한 말탄 사람.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팔 벌리거나 잠자코 허공을 묵시하는 듯한 그 사람의 몸짓. 고졸하면서도 애절한 울림을 던지는 이 기마상의 조각가 마리노 마리니의 작품들이 한국에 왔다.
이탈리아 마리니 재단과 국립현대미술관의 공동주최로 14일 서울 덕수궁 미술관에서 특별전 ‘마리노 마리니: 기적을 기다리며’(4월22일까지)가 막을 올렸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자코메티와 더불어 실존주의 조각의 계보를 만든 이탈리아 거장의 실물 조각, 회화 105점을 국내 처음 선보이는 자리다.
마리노 마리니는 서양에서 기념비적 고전 조각의 주된 소재였던 기마상을 전혀 다른 실존적 대상물로 탈바꿈시켰다. 표정, 장식 등의 디테일이 사라지고, 존재감만 강조된 그의 기마상에서는 영웅이나 제왕들이 탔던 기념미적 권위는 간데없다. 역사적 변화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염세와 불안, 실존적 고통이 묻어 있는 대상일 뿐이다. 마리니는 기마상의 변신을 통해 전통 조각의 기념비적 너울을 걷어버리고 20세기 초 모더니즘 조각의 길을 확고히 닦았다. 그는 모딜리아니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 조각 예술의 자양분을 현대미술 속으로 빨아들인 주역이기도 하다. 모딜리아니가 그리스 조각상의 인간적 포즈에서 우아한 여성성을 끄집어냈다면, 마리니는 기마상을 통해 남성적 육감을 뽑아내었다. 현대미술사를 휘저은 여성수집가 페기 구겐하임이 컬렉션 왕국인 베네치아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정원에 수호 상징물처럼 설치한 것이 마리니의 팔 벌리고 성기를 곧추세운 남자의 기마상이었다.
재단 소장품들인 전시 출품작의 고갱이 또한 이 기마상 연작과 그 밑그림 격의 작품들이다. 기마상은 1934년 독일 여행 때 밤베르크 대성당에 전시된 앙리 2세의 기마상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했다. 초창기엔 강건한 형태감을 유지하지만, 전후부터 갈수록 불안하게 자세가 흐트러지다가 60년대 이후에는 말탄 사람이 땅에 나동그라지거나 존재가 말소되면서 작가적 실존의식의 변천과정을 엿보게 한다. 눈대목인 기마상 외에 알몸의 여신상 조각인 포모나(Pomona), 그리고 스트라빈스키, 샤갈 같은 예술가의 초상 연작이 나왔다. 풍만한 누드 연작인 포모나 연작은 기마상과 달리 실존의 고통을 고대 예술, 자연과의 교감에서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또다른 수작이다. 매주 금, 토, 일 야간 개장 시간(오후 5시30분~8시30분)에는 입장료 20%를 깎아준다. 마리니 탄생일인 27일도 20% 할인된다. (02)2022-0612. 이밖에 서울 인사동 선화랑(02-734-0458)도 기마상 연작의 바탕이 된 마리니의 채색 회화와 드로잉, 판화, 기마상 소품 따위를 22일부터 3월21일까지 전시한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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