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황색여관
연극에서 ‘죽음’ 혹은 ‘몰살’은 참 매혹적인 소재다. 우리 의식의 심연에 자리한 ‘상호투쟁’의 욕망과 그 결과에 대한 ‘허무감’을 동시에 자극하는 까닭이다. ‘욕망에 이끌려 죽음으로 행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생에 관한 가장 상투적인 비유가 될 수 있기에 지금까지 예술사를 통해 무한한 복제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이강백 작, 오태석 연출의 <황색여관>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황사 가득한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하나 있는 한 여관에서 밤새 벌어지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살육의 이야기, 그 살육을 조장하고 조종하며 재물을 챙기는 주인 부부에 대한 이야기다. 살인을 막으려 안간힘 쓰는 주인집 처제의 노력이나 ‘어린 왕자’ 같은 행색의 대학생 투숙객의 낙천성도 이 사태를 막을 힘은 못된다.
황색 저널리즘이나 황사의 부정적 이미지를 실은 ‘황색 여관’이란 제목의 선택은 이 작품이 주는 매력의 핵심이다. 자본주의 법칙이 가장 원초적으로 작동하는 이 여관에선 등장인물들이 사회적 가면을 벗어버린 채 의심과 공포에 사로잡혀 서로를 죽이는데 혈안이 된다. 작가는 냉소적인 태도로 사태를 관망함으로써 작품을 ‘쿨’하게 만든다.
하지만 연극은 여기서 함정에 빠지고 만다. 등장인물을 살아 있는 인물로 파악하기보단 도식적인 인간 군상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개개인의 욕망의 특수성은 제거되어 버리는 것이다. 작가의 의식과 등장인물의 의식 수준이 너무 차이가 난다. 작가의 결정론적 도식을 완성하는 군상들만큼 재미없는 캐릭터는 없다.
연출가는 작가의 도식적 배치를 뒤집음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자 했다. 1층의 젊은 투숙객들과 2층의 나이든 축을 거꾸로 배역함으로써 작품상의 ‘나이’가 육체적 나이가 아니라 정신적 나이라는 의미를 얹는다든가 하는 것 등. 이것이 관객의 의아함을 증폭시키고 낯설게 하기는 하지만 배우들의 애매모호한 태도로 인해 그 의도가 명료하게 전달되지는 않는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회, 모두가 주장이 있지만 다른 이의 주장에는 귀기울이지 않는 사회, 이것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아직도 명백한 도식성으로 읽을 수 있는 사회였던가. 연극이 기획의 장대함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세심함의 결여’에 있는 것은 아닌가. 4월8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노이정/연극평론가 voiver@hanmail.net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