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시련> 포스터
아주 오랜만에 정통연극을 한 편 보고 돌아왔다. 3시간이 넘는 공연시간으로 인해 밤 12시가 다 되어 돌아왔지만 그 뜨거운 감동을 주체할 수가 없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컴퓨터에 앉아 따끈한 소감문 하나 쓰고 있다. 그 동안 주로 뮤지컬 중심의 공연 문화나 영화에 익숙했던 때문인지 미장센 하나 변변히 갖추지 않고 오로지 배우들만의 연기력과 호흡으로만 승부하는 정통 연극은 시절의 찌꺼기를 씻어내고 내 삶을 정화시키는 정화수에 나를 깊이 침잠시키는 것과도 같은 그런 경험으로 이끌어 주었다.
토월극장에서 정통연극시리즈로 공연되고 있는 작품 가운데 그 여덟 번째인 아서 밀러의 <시련>(The Crucible, 1953년 작)이었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연출가인 윤호진 씨의 16년만의 연극무대였다. 김명수, 정동환, 손봉숙, 김진태, 권성덕 씨 등 중견연기자들과 그 외 젊은 연기자들이 호흡을 맞춘 그런 무대였다. 화려한 무대장치나 조명, 음향 등 연기 외적인 장식들을 극도로 배제한 채 오로지 연기자들의 내면의 연기로만 작품을 승화시키고자 하는 깊이 있는 무대였다. 사건의 배경과 대사 하나 하나에 시대적 화두를 예리하게 들춰내어 사회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치열한 무대였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진실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 종교윤리적 화두를 찾는 구도자로 관객을 인도하는 진지한 무대였다.
이만 하면 내가 무엇을 보고 이렇게 잠을 설치고 있는 지 알 수 있겠는가? 물론 아닐 것이다. 이런 식의 요약적인 정리만으로는 이 연극에 담겨 있는 진실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없다. 그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 연극에 참여하는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연극에서 작가나 연출가, 연기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 길 밖에는 없을 것이다. 아직 다 식지 않은 감동을 가지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길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연극, <시련>의 내용은 이렇다. 때는 중세를 막 벗어난 1692년, 미국 메사츄세츠 주의 세일럼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경건하고 도덕적인 종교적인 계율 속에 살아가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어린 10대의 소녀들이 악마의 춤을 추다가 목사의 딸이 쓰러지면서 마을 사람들은 악마의 저주가 들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악마의 춤을 추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 놀이에 참여했던 소녀들은 악마가 찾아들어 자신들을 충동했다고 거짓 고백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 마법과 악마에 대한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간다. 이로 인해 마녀사냥 전문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존 헤일 목사가 마을에 오게 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악마의 출현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마녀재판에 몰아세운다. 결국 서로간의 반목과 질시로 자신들이 미워하는 사람들을 고소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마을에서 가장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들인 레베카, 코레이, 엘리자베스까지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이 마녀재판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정의를 구현하려던 존 프락터 마저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언도를 받게 되지만 프락터는 악마의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라는 재판관의 제안을 끝내 거절하고 결국 화형대 위에 서게 된다.
연극의 내용은 마녀재판에서 자신의 명예와 존재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순교자의 삶을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악과 선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것이 17세기의 마녀재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상 아서 밀러는 이 연극을 통해 1950년대 미국 사회에 몰아쳤던 매카시즘을 비판하고자 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 때 미국의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J. R. 매카시는 미국 의회 내에 200여명 이상의 공산당원들이 있다는 발언으로 소위 여론몰이에 나섰고, 이 일로 인해 미국에서는 소위 메카시 선풍이 일어 진보적인 정치인, 학자, 언론인들을 몰아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가 잘 아는 매카시즘의 유래이다. 아서 밀러는 당대에 벌어진 매카시즘이 17세기 마녀재판이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집단 광기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악의 구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이 작품을 썼던 것이다. 그가 이 작품의 제목을 <시련>(The Crucible)이라고 붙은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일련의 역사적 과정으로 인간의 정신과 진실의 추구가 정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을 보면서 내내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움이 있었다. 과연 지금 우리사회는 이런 여론몰이식 마녀재판이 사라졌는가? 하는 질문에 긍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연극은 70~80년대 우리의 사회적 화두를 담고 있다. 그래서 연출가는 이 연극을 80년대에 무대에 올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이 연극 상연기획은 취소되었고, 그 때문에 연출가는 홀연히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 때 우리 사회는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광기 아래 놓여 있었다. 반공 이데올로기, 레드 콤플렉스로 분석되는 그 집단적 광기의 현실 하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그 때 만일 이 연극이 상연되었더라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시대적 아픔에 공감하면서 가슴을 쓰러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사라진 지금, 이 연극을 보고 있던 많은 젊은 관객들의 가슴에 이 연극이 얼마나 와 닿았을까? 연극 중간 중간에 관객들의 웃음소리를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배우들의 재치 속에서 나 자신도 웃곤 했다. 하지만 전혀 웃을 수 없는 그 진지한 내용 앞에서 웃음을 보인 나 자신과 관객들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우리 시대의 마녀재판, 그것은 절대로 웃을 수 없는 진지한 역사였다. 정말로 무거운 역사였다. 그 재판에 희생된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도 그 시대의 고통을 몸으로 안고 사는 우리 시대의 투사들이 있지 않은가? 우리 역시 80년대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서 얼마나 많은 매카시즘적 희생을 치루었던가? 그런 우리네 역사는 매우 진지한 역사였다. 연기자들의 대사들을 통해서 그 때의 역사적 기억들이 언뜻 언뜻 떠오를 때마다 가슴에 밀려오는 설움을 억눌러야했다. 그래도 시간은 많이 흐른 것 같다. 이제는 그런 설움이 제법 쉽게 억눌러지는 것을 보면.... 우리 시대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이 종교윤리적 화두가 연극 내내 떠나지 않고 내 머리 속을 맴돌았다. 17세기 마녀재판의 심판관들은 하나님을 단지 도구적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저들은 하나님의 진실 앞에서도 꿈쩍하지 않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만 그 이름을 들먹였다. 그러다가 프락터의 외침처럼 “신은 죽었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의 절규와 니체의 외침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프락터는 니체의 전신이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칫 도구적 존재로만 인식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분의 진실을 현대의 기독교는 알기나 하는 걸까? 자칭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사용하는 기독교적인 언어가 이 연극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그렇게 낯선 것들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도 나의 신앙 고백 언어들을 그렇게 낯설게 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마녀재판이든, 매카시즘이든, 여론몰이든....집단적 정의라는 허울은 자칫 개인의 자유의 인권을 훼손하는 악마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존 프락터의 내면 속의 갈등에서 비춰지는 것처럼 한 개인이 그 집단적 광기에 대항해서 진실을 지키고 자유를 얻기란 쉽지 않다. 그것이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면서도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것을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형대로 향하는 프락터와 코레이의 등을 바라면서 앤딩과 함께 뜨거운 박수를 보냈던 관객들 역시 그것을 공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프락터가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고 진실을 전한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 그런 박수를 받을 만큼 용기 있는 주인공이 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제발 집단적 광기로 개인의 자유와 인격이 훼손당하지 않는 그런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회가 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연극의 내용으로 인한 감동 외에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연극이 연기자들의 연기로 승부해야만 하는 정통연극이었기 때문에 연기자 개개인들의 연기력을 가까이서 평가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토마스 푸트남 역을 맡은 연기자의 대사가 잘 전달이 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아마도 발성부분에서 호흡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인 것 같았다. 주인공인 존 프락터의 부인으로 등장했던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여주인공은 목소리가 좀 작은 탓인지 발성에 약간의 무리가 느껴졌다. 그 외에 순간순간의 재기를 보여준 여러 연기자들의 연기력은 대체적으로 공감을 받았던 것 같다. 연출 부분에서는 인터미션 이후의 3막과 4막에서 내용전개의 개연성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는 원작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연출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극의 전개과정에서 약간씩의 비약이 존재함으로써 개연성이 밀도 있게 제시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물론 순간순간의 복선을 다 이해하지 못한 관객의 탓일 수도 있겠다. 암튼 연출 부분에서의 아쉬움 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들이 감동을 상쇄시키지는 못했다. 내용에 담겨진 메시지를 곱씹으면서 80년대 대학시절의 치열했던 삶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감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연 시작 전부터 로비를 가득 메운 젊은 관객들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문화와 진정으로 호흡하고 그 향연을 만끽할 수 있는 젊은 세대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이 모두가 나의 영혼의 카타르시스가 되었다. 막이 내리고 커튼콜이 진행되는 동안 얼마나 많이 박수를 쳤는지 모른다. 그것은 열연을 보여준 연기자들을 격려하는 박수이자 동시에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영혼의 정화를 체험한 나를 축하하는 박수였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박수로서 다른 사람들과 나를 격려하기도 정말 오랜만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연극의 내용은 마녀재판에서 자신의 명예와 존재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순교자의 삶을 살고자 했던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 악과 선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것이 17세기의 마녀재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상 아서 밀러는 이 연극을 통해 1950년대 미국 사회에 몰아쳤던 매카시즘을 비판하고자 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그 때 미국의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던 J. R. 매카시는 미국 의회 내에 200여명 이상의 공산당원들이 있다는 발언으로 소위 여론몰이에 나섰고, 이 일로 인해 미국에서는 소위 메카시 선풍이 일어 진보적인 정치인, 학자, 언론인들을 몰아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가 잘 아는 매카시즘의 유래이다. 아서 밀러는 당대에 벌어진 매카시즘이 17세기 마녀재판이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집단 광기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악의 구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이 작품을 썼던 것이다. 그가 이 작품의 제목을 <시련>(The Crucible)이라고 붙은 이유는 아마도 이런 일련의 역사적 과정으로 인간의 정신과 진실의 추구가 정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연극을 보면서 내내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움이 있었다. 과연 지금 우리사회는 이런 여론몰이식 마녀재판이 사라졌는가? 하는 질문에 긍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연극은 70~80년대 우리의 사회적 화두를 담고 있다. 그래서 연출가는 이 연극을 80년대에 무대에 올리고 싶어 했다. 하지만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이 연극 상연기획은 취소되었고, 그 때문에 연출가는 홀연히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 때 우리 사회는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광기 아래 놓여 있었다. 반공 이데올로기, 레드 콤플렉스로 분석되는 그 집단적 광기의 현실 하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그 때 만일 이 연극이 상연되었더라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시대적 아픔에 공감하면서 가슴을 쓰러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치열한 이데올로기 대립이 사라진 지금, 이 연극을 보고 있던 많은 젊은 관객들의 가슴에 이 연극이 얼마나 와 닿았을까? 연극 중간 중간에 관객들의 웃음소리를 여러 번 들을 수 있었다. 물론 배우들의 재치 속에서 나 자신도 웃곤 했다. 하지만 전혀 웃을 수 없는 그 진지한 내용 앞에서 웃음을 보인 나 자신과 관객들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우리 시대의 마녀재판, 그것은 절대로 웃을 수 없는 진지한 역사였다. 정말로 무거운 역사였다. 그 재판에 희생된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도 그 시대의 고통을 몸으로 안고 사는 우리 시대의 투사들이 있지 않은가? 우리 역시 80년대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서 얼마나 많은 매카시즘적 희생을 치루었던가? 그런 우리네 역사는 매우 진지한 역사였다. 연기자들의 대사들을 통해서 그 때의 역사적 기억들이 언뜻 언뜻 떠오를 때마다 가슴에 밀려오는 설움을 억눌러야했다. 그래도 시간은 많이 흐른 것 같다. 이제는 그런 설움이 제법 쉽게 억눌러지는 것을 보면.... 우리 시대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이 종교윤리적 화두가 연극 내내 떠나지 않고 내 머리 속을 맴돌았다. 17세기 마녀재판의 심판관들은 하나님을 단지 도구적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저들은 하나님의 진실 앞에서도 꿈쩍하지 않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만 그 이름을 들먹였다. 그러다가 프락터의 외침처럼 “신은 죽었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의 절규와 니체의 외침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프락터는 니체의 전신이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칫 도구적 존재로만 인식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분의 진실을 현대의 기독교는 알기나 하는 걸까? 자칭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사용하는 기독교적인 언어가 이 연극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그렇게 낯선 것들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도 나의 신앙 고백 언어들을 그렇게 낯설게 듣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지 않을 수 없다. 마녀재판이든, 매카시즘이든, 여론몰이든....집단적 정의라는 허울은 자칫 개인의 자유의 인권을 훼손하는 악마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존 프락터의 내면 속의 갈등에서 비춰지는 것처럼 한 개인이 그 집단적 광기에 대항해서 진실을 지키고 자유를 얻기란 쉽지 않다. 그것이 소중한 것인지를 잘 알면서도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것을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형대로 향하는 프락터와 코레이의 등을 바라면서 앤딩과 함께 뜨거운 박수를 보냈던 관객들 역시 그것을 공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프락터가 자신의 양심을 지켜내고 진실을 전한 용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 그런 박수를 받을 만큼 용기 있는 주인공이 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제발 집단적 광기로 개인의 자유와 인격이 훼손당하지 않는 그런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회가 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연극의 내용으로 인한 감동 외에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연극이 연기자들의 연기로 승부해야만 하는 정통연극이었기 때문에 연기자 개개인들의 연기력을 가까이서 평가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토마스 푸트남 역을 맡은 연기자의 대사가 잘 전달이 되지 않는 답답함이 있었다. 아마도 발성부분에서 호흡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인 것 같았다. 주인공인 존 프락터의 부인으로 등장했던 엘리자베스 역을 맡은 여주인공은 목소리가 좀 작은 탓인지 발성에 약간의 무리가 느껴졌다. 그 외에 순간순간의 재기를 보여준 여러 연기자들의 연기력은 대체적으로 공감을 받았던 것 같다. 연출 부분에서는 인터미션 이후의 3막과 4막에서 내용전개의 개연성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는 원작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 연출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극의 전개과정에서 약간씩의 비약이 존재함으로써 개연성이 밀도 있게 제시되지 못하는 점이 있었다. 물론 순간순간의 복선을 다 이해하지 못한 관객의 탓일 수도 있겠다. 암튼 연출 부분에서의 아쉬움 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들이 감동을 상쇄시키지는 못했다. 내용에 담겨진 메시지를 곱씹으면서 80년대 대학시절의 치열했던 삶을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감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연 시작 전부터 로비를 가득 메운 젊은 관객들을 보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문화와 진정으로 호흡하고 그 향연을 만끽할 수 있는 젊은 세대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이 모두가 나의 영혼의 카타르시스가 되었다. 막이 내리고 커튼콜이 진행되는 동안 얼마나 많이 박수를 쳤는지 모른다. 그것은 열연을 보여준 연기자들을 격려하는 박수이자 동시에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영혼의 정화를 체험한 나를 축하하는 박수였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박수로서 다른 사람들과 나를 격려하기도 정말 오랜만이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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