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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블로그] 당신의 삶을 비춰드리겠습니다

등록 2007-04-29 17:45

연극 <임대아파트>를 보고

공연장에 들어서면 관객은 에티켓에 대해 요구를 받는다. 극중에서 대학생으로 나오는 정수(김강현)는 손에 초를 들고 나와서 관객에게 핸드폰전원을 꺼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리고 그가 무대 위 탁자에 초를 놓고 나가자 극이 시작된다. 초는 공연 전체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소품이다. 공연에서 초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 들여다보자.

일상에서 초는 전기가 나가거나 사람들 혹은 연인들이 분위기를 잡을때 사용된다. 하지만 <임대아파트>에서는 영화감독지망생 재생의 독특한 습관을 나타내준다. 재생은 술을 먹거나 글을 쓸 때 꼭 촛불을 켠다. 그리고 초를 켜는 그의 습관은 정현과의 관계를 지속시켜주는 다리와 같다. 지금 재생(임학순)은 동대문에서 옷가게를 하는 정현(이지현)과 사귀는 사이다. 회상씬에서 재생은 비 오는 날, 정현과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은 글을 쓸 때 촛불을 켜놓는다는 행동을 한다. 그리고 순진한 정현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그녀는 재생에게 “사랑해요?”라는 말로 믿음을 확인한 후, 씻으러 간다. 재생은 화장실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정현의 말에 “오빠가 갈게”라고 능청스럽게 촛불을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비가 오지 않았고, 정전이 되지 않았다면,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초와 정전에 의해 시작된 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재우는 연기지망생 정현의 오빠인 정수(지우석)와 친한 친구사이다. 그래서 재우와 정수 사이에서 정현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어떤 일에든 권태가 오듯 재생과 정현의 사이는 자꾸 어긋난다. 혼기가 찬 정현은 1년 전에도 글만 쓰고 있던 재생만을 믿고 있다. 연기 인생이 풀리지 않는 정호와 시나리오 계약이 되지 않는 재생의 앞날은 잦은 술자리들로 채워진다. 초를 켜고 술을 마시면서 재생은 시나리오에 대해 정호와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실랑이를 벌인다. 재생이 말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란 자신의 집에 불이 꺼지고 나머지 집만 불이 켜지는 일을 말한다. 그에 비해 정호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재생이 담배를 피러 나간 사이, 초자연적인 일은 정전이 된 상태에서 일어난다.

초자연적인 현상은 색다른 사랑이야기를 풀어낸다. 초는 정현과 재생에 아웅다웅하는 사랑이야기와 더불어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정호의 이야기까지 밝혀준다. 정호는 너무나 사랑했던 첫사랑 선영(김선미)을 잊지 못한다. 정호는 항상 자신의 주위에 환영으로 선영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는 선영의 사진을 보면서 혼자 대화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면서 정호는 선영을 잊으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촛불이 벽에 비쳐서 그림자를 만들어내듯 정호와 환영으로 존재하는 선영의 사랑이야기는 애틋하게 느껴진다.

정전이 되어 불 꺼진 방안에 정호와 유까만 남게 된다. “정수 어디가 그렇게 좋아?”라고 묻는 정호의 물음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정호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콩글리시로 어떻게든 이야기하려한다. 유까는 일본말로 길게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유까의 빈자리에 환영으로 선영이 등장해 정호 옆에 앉는다. 그리고 정호는 처음으로 선영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선영은 장애가 있어서 말이 어눌하다고. 그런데 처음 장면과 정전될 때마다 환영으로 등장해서 사라졌던 선영이 또박거리는 말투로 정호에게 말한다. 그래서일까. 지금까지 귀신이라고 생각했던 선영의 존재가 너무나 선명하게 사람으로 보여져 극의 긴장감을 떨어트린다. 정호와 선영의 대화는 재생의 시나리오에 나오는 장면으로 현실과 환상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리고 초에 대해 다시 언급되는 장면이 이어진다. 정현의 생일은 낙태를 한 날이다. 정현은 괴로워하는 재생에게 미역국을 먹으면서 다음에 아이를 가지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녀는 초지일관. 초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 넣는다.


<임대아파트>는 초지일관, 따뜻함으로 자신들의 아파트를 비춘다. 초는 단순히 어둠을 밝히고, 함께 할 수 있게 해주고, 글을 써주게 해주고, 환영과의 재회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초는 초지일관, 그들의 사랑을 변하지 않게 지켜주었다. <임대아파트>에서 주고자 했던 이야기, 당신의 삶을 그들의 이야기로 비춰주고 싶어 한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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