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선에 실린 너무 많은 사랑

[리뷰] 연극 ‘다리퐁 모단걸’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은 객석을 나서면서 껐던 휴대폰을 꺼내어 확인한다. 자신이 ‘접속’을 중단하고 있던 사이 행여 세상으로부터 ‘호출’은 없었는지. 그런데 〈다리퐁 모단걸〉 공연 뒤에는 느낌이 좀 다르다. 연극이 전화기의 의미에 관한 것인 까닭이다. 관객들 뇌리에는 무대 중앙에 놓여 있던 커다란 구식 전화기의 여운이 남아 있다. 자신의 휴대폰을 새삼 바라보며 통신의 ‘유비쿼터스’ 시대를 실감하기도 할 것이다.

이해제가 쓰고 연출한 이 작품은 커피와 ‘슈가’ 그리고 ‘다리퐁’(텔레폰)이 도입되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던 고종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신문물의 속도전이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동시에 두렵게 하던 그때가 풍속사처럼 그려진다. ‘다리퐁’이 가져다준 변화와 에피소드가 연극에 넘쳐난다.

이해제는 사람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이 연극에도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배우 수가 한정되어 있으므로 1인 3역은 기본이다. 개화기판 ‘러브 액추얼리’인가? 전화기를 매개로 한 사랑의 에피소드가 밑도 끝도 없이 계속 흘러나온다. 모자간의 사랑, 형제간 사랑, 왕을 향한 신하의 사랑과 그것을 뛰어넘는 동료애, 그리고 상처받고 결격 있는 사람들의 사랑, 사랑, 사랑.

그 와중에 펼쳐지는 조선 최초 여성 전화교환수의 외사랑 이야기는 실상 그다지 감동을 주진 않는다. 주인공들의 행동이 좀 로맨틱하긴 해도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다. ‘다리퐁’에 얽힌 이야기인 건 사실이지만 별로 ‘모단’하지도 않다. ‘모단걸’의 사랑이라면 성격의 문제보다는 사상의 문제를 들춰야 하지 않을까.

일인다역을 하는 배우들이 특색 있는 연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 비해 이 사랑의 주인공들인 배수빈, 최보광, 김영은의 연기는 순진할 뿐이어서 지루함이 더하다.

경쾌한 울림을 주는 제목과 걸맞게 희극적 감성이 유지되는 이 연극에서 신세대 입담꾼 이해제의 특징은 되살아나고 있다. 하지만 〈지리다도파도파 설공찬전〉에 묻어나던 특유의 풍자적 감각은 여기 없다. 그 대신 요즘 대중문화의 추세대로 ‘애틋한 인간적 이야기’ 차원에서 멈춘다. 동시다발적으로 그려낸 많은 인물들의 사연들, 두 시간 가량의 연극은 이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에는 좀 짧았던 듯싶다. 6월3일까지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노이정/연극평론가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