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입선작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엇비슷한 유형의 그림들이 대를 이었다. 오른쪽부터 이경순, 오승윤, 김창희씨의 ‘좌상’.
1970년대 한국미술전
‘보수’ 대 ‘실험’ 서로 경쟁하며
흐름 이끌고 당대 최고작 생산 1970년대 한국미술은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나? 예술의전당에서 3일부터 6월24일까지 여는 <1970년대 한국미술-국전과 민전작가>에서는 전모는 아니지만 일부를 엿볼 기회다. 흔히 ‘국전’으로 불렸던 대한민국전람회와 한국미술대상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 등 민전에서 특선 이상을 한 작가 90명 가운데 51명의 작품 81점을 전시한다. 1949년에 처음 시작한 국전은 74년부터 봄가을 두 차례 열리다가 1981년 30회를 끝으로 중단됐다. 당시 신문들은 국전의 당선작 발표를 위해 호외를 냈으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람회장을 찾아가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971년 10월 신문을 보면 개막 첫날인 11일 박대통령이 1시간 45분동안 머물며 작품을 감상하고 작가, 심사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눴음을 알 수 있다. 국전은 일종의 등용문. 입상 경력은 작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될 뿐더러 교직으로 가는 데 중요한 첨부자료가 됐고, 그림값이 오르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작가들은 출품에 목을 맸고 심사위원 선정과 작품 선별을 싸고 시비가 그치지 않았다. “좋은 작품에 대한 기대보다, 얼마나 시시한 작품이 수상할까를 점치는 나쁜 습관이 들었다”는 미술평론가도 있었을 정도. 76년 봄 국전에는 심사위원들이 토론없이 신호등으로 입-락 의사표시를 하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다. 관이 주도하는 행사라 당시의 정치적 성향이 반영되고 홍대파-서울대파의 아카데미즘이 가세해 보수적 성향을 보인 것이 국전의 특징이었다. 19회(1970) 대통령상을 받은 서양화 ‘과녁’의 작가는 육군대위 출신이었고 그는 “한산도 일대의 궁터를 돌아보다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선조들이 무술을 단련하던 모습을 떠올리고 그 정신력을 표현해보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22회(1973년) 국회의장상에 서양화 비구상 ‘한민족의 저력’(강정완)이, 23회 봄국전 국회의장상에 ‘역사광장계획안’이, 75년 봄국전에는 대통령상에 고분벽화를 소재로 한 서양화 ‘회고’(강정완)가 선정되는 등 수상작들이 일정한 경향을 보였다. 국전과는 다른 한쪽에 언론사들이 위주가 된 민간미술대전, 이른바 ‘민전’들이 생겨난 것도 1970년대였다. ‘한국미술대상전’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이 등장했다. 국전과 민전은 정치적 성향과 심사 잡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경쟁하면서 미술계의 흐름을 이끌었고 당대의 최고 작품을 견인해냈으며 신예작가를 배출하는 창구 구실을 했다. 예술의전당 오병욱 전시예술감독은 “이번 전시회는 작년말부터 올초까지 열린 <1950~60년대 한국미술-서양화 동인전>의 연장선으로 당대 최고의 작품을 보여주고자 한다”면서 정치적 배경 등 작품 외적인 것보다 작품 자체에 주목해 줄 것을 주문했다. 그는 또 “70년대의 치열한 경쟁을 겪어낸 작가들이 한국현대미술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고, 그들이 사용한 조형언어들이 오늘의 현대미술의 모습을 갖추게 했다”며 “이번 전시에서 70년대의 조형언어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연결고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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