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경력이 모두 40년 이상인 세 연기 베테랑 이호재, 오영수, 전양자씨(왼쪽부터)
연극 ‘언덕을 넘어서 가자’ 연습현장
중견배우 3인방 호흡 척척
수줍고 설레게 뒤늦은 고백
실제공연하듯 두시간 주욱~ 누구나 가슴 한켠에는 이루지 못한 첫 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묻어둔다. 그런데 50년 세월을 보낸 뒤 첫 사랑이 불쑥 찾아온다면. 그 시절 매몰차게 상처만 주던 짝사랑 상대가 뜻밖에 고이 간직했던 첫 사랑을 고백해온면…. 25일부터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언덕을 넘어서 가자>는 ‘실버 세대’의 첫 사랑을 다루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재고 따지는 사랑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더께에도 빛바래지 않는 노인들의 사랑과 우정을 이야기한다. 연극계 중진 이호재(66)씨, 국립극단을 대표하는 배우 오영수(63)씨, 방송 드라마로 낯익은 전양자(65)씨 세 배우가 출연한다. 모두 40년 넘는 연기 내공으로 진득한 삶의 무게를 전할 줄 아는 힘 있는 연기파 배우들이다. ‘한국말의 말 맛을 가장 잘 아는 작가’라는 평을 듣는 이만희씨가 극본을 썼고,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등으로 노년층 정서를 섬세하게 다루는 솜씨를 보여준 위성신(44)씨가 연출을 맡았다. 2일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서울 대학로 서울문화재단 제3연습실 문을 열자마자 전양자씨의 웃음 소리가 먼저 삐져나왔다. “정말 오영수씨는 딱 자룡이야. 어쩜 그렇게 딱 맞는 배우를 골랐을까? 정말 신기해.” 젊은 시절 캬바레와 도박장을 전전한 70대 철부지 노인 자룡이 수작을 걸어오는 장면을 연기하자 전양자씨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자꾸 대사를 끊어먹는다. “오영수씨가 자기를 자룡 역으로 캐스팅한 줄도 모르고 연출가에게 자룡역을 하겠다고 떼를 섰다”며 에피소드를 들려주자 모두들 박장대소한다. <언덕을 넘어서 가자>는 50년 전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완애(이호재)와 자룡(오영수), 다혜(전양자)가 오랫동안 감춰뒀던 각자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첫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을 그렸다. 무뚝뚝한 완애는 상당한 재력가임에도 독신을 고집하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구두쇠. 자룡은 친구 완애의 고물상에 얹혀 사는 신세이지만 돈만 생기면 성인 오락실로 달려가는 철부지 노인. 어린 시절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다혜는 남편과 사별하고 사고뭉치 아들의 빚 때문에 황혼의 나이에도 여전히 보험설계사로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이날 연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 공연처럼 연습하는 ‘런 스루’(Run Through)로 진행됐다. 올해 초 일찌감치 배역이 정해졌지만 세 배우가 모두 바쁜 탓에 지난달 10일부터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워낙 노련한 배우들이라 세 사람이 한 무대에 서는 것이 처음인데도 척척 죽이 맞는다. “깔끔하고 착하고 순정파이면서 의리있는 게 평소 내 캐릭터야. 이만희 선생이 날 보고 썼다던데 역시야. 완애는 땅만 없다뿐이지 바로 나네.” 이호재씨가 우스개를 던지자 전양자씨가 바로 받는다. “그런 사람만 있으면 당장 쫓아갈꺼야. 나 이래봐도 아직 솔로예요.” 오영수씨는 엄살을 부린다. “이만희 선생 <피고지고>에서도 비슷한 역을 맡았는데 아마 이 선생이 날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쓴 것 같아. 캬바레 왕으로 나오는데 왜 그런 것을 집어넣은지 모르겠네, 난 춤도 못 추는데….” 이호재씨의 친절한 귀띔이 이어진다. “원래 원작에 없던 것을 이만희 선생이 오영수가 자룡 역을 한다고 해서 일부러 춤추는 장면을 20분이나 넣었어.” 오씨의 걱정대로 오씨와 전양자씨의 탱고 장면 연습은 결국 연출가 위씨에게 몇차례 지적을 받았지만, 두 시간 연습은 그야말로 물 흐르듯 지나가고 있었다.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뒤풀이는 ‘각1병’, 안주는 추억담 연습이 끝나고 이호재씨의 제의로 근처 통닭집으로 옮기자마자 이씨의 그 유명한 ‘각 1병’이 시작됐다. 소주든 맥주든 음료수이든 각자가 1병씩 시켜서 서로 잔을 권하지 않고 스스로 따라 마시는 주법이다. 전양자씨는 <언덕을 넘어서 가자>가 “딱 나이에 맞아서 좋다”며 “실제 우리 세대에서는 좋아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곤 했는데, 요즘 시대에는 아마 이런 사랑이 없을 것 같다”고 말문을 열었다. 오영수씨도 “인생을 오래 살면 깊은 맛이 있는데 요즘 대학로에 중년 이상 관객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작품이 너무 없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동석한 이씨의 팬클럽 ‘빨간 소주’의 회장 이승무(57·의상 디자이너)씨가 “그러니까 설익은 후배들을 따끔하게 혼내려면 세 분이 자주 연극무대에 서시라”고 주문한다. 중견들은 나이가 들수록 열정이 더욱 강해지고 그래서 중진 자격을 가지는 듯했다. 세 사람 모두 더 많이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이야기를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전씨는 “2년에 한번”, 이씨는 “1년에 2편” 오씨는 “잡힌 일정말고 모노드라마 한번” 하는 것이 목표다. “옛날에는 많이 할 때는 1년에 아홉 작품도 뛰었어. 저녁에 공연하면서 오전에는 다른 작품 연습을 했지. 그때는 장기공연할 공연장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요즘 같아서야.”(이호재) “겨우 드라마센터나 명동 예술극장밖에 더 있었어요? 또 한 여름과 한 겨울에는 공연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단이 3~5일 밖에 공연하지 못했어.”(오영수) 70~80년 연극의 황금시대가 언급되면서 ‘각 1병’이 ‘각 2병’, ‘각 3병’으로 늘어나고, 밤 깊은 대학로 골목을 떠도는 노배우들의 추억담이 그칠 줄 모른다. 정상영 기자
수줍고 설레게 뒤늦은 고백
실제공연하듯 두시간 주욱~ 누구나 가슴 한켠에는 이루지 못한 첫 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묻어둔다. 그런데 50년 세월을 보낸 뒤 첫 사랑이 불쑥 찾아온다면. 그 시절 매몰차게 상처만 주던 짝사랑 상대가 뜻밖에 고이 간직했던 첫 사랑을 고백해온면…. 25일부터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언덕을 넘어서 가자>는 ‘실버 세대’의 첫 사랑을 다루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재고 따지는 사랑이 아니라 오랜 세월의 더께에도 빛바래지 않는 노인들의 사랑과 우정을 이야기한다. 연극계 중진 이호재(66)씨, 국립극단을 대표하는 배우 오영수(63)씨, 방송 드라마로 낯익은 전양자(65)씨 세 배우가 출연한다. 모두 40년 넘는 연기 내공으로 진득한 삶의 무게를 전할 줄 아는 힘 있는 연기파 배우들이다. ‘한국말의 말 맛을 가장 잘 아는 작가’라는 평을 듣는 이만희씨가 극본을 썼고,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 등으로 노년층 정서를 섬세하게 다루는 솜씨를 보여준 위성신(44)씨가 연출을 맡았다. 2일 막바지 연습이 한창인 서울 대학로 서울문화재단 제3연습실 문을 열자마자 전양자씨의 웃음 소리가 먼저 삐져나왔다. “정말 오영수씨는 딱 자룡이야. 어쩜 그렇게 딱 맞는 배우를 골랐을까? 정말 신기해.” 젊은 시절 캬바레와 도박장을 전전한 70대 철부지 노인 자룡이 수작을 걸어오는 장면을 연기하자 전양자씨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자꾸 대사를 끊어먹는다. “오영수씨가 자기를 자룡 역으로 캐스팅한 줄도 모르고 연출가에게 자룡역을 하겠다고 떼를 섰다”며 에피소드를 들려주자 모두들 박장대소한다. <언덕을 넘어서 가자>는 50년 전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완애(이호재)와 자룡(오영수), 다혜(전양자)가 오랫동안 감춰뒀던 각자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첫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을 그렸다. 무뚝뚝한 완애는 상당한 재력가임에도 독신을 고집하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구두쇠. 자룡은 친구 완애의 고물상에 얹혀 사는 신세이지만 돈만 생기면 성인 오락실로 달려가는 철부지 노인. 어린 시절 남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다혜는 남편과 사별하고 사고뭉치 아들의 빚 때문에 황혼의 나이에도 여전히 보험설계사로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이날 연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 공연처럼 연습하는 ‘런 스루’(Run Through)로 진행됐다. 올해 초 일찌감치 배역이 정해졌지만 세 배우가 모두 바쁜 탓에 지난달 10일부터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워낙 노련한 배우들이라 세 사람이 한 무대에 서는 것이 처음인데도 척척 죽이 맞는다. “깔끔하고 착하고 순정파이면서 의리있는 게 평소 내 캐릭터야. 이만희 선생이 날 보고 썼다던데 역시야. 완애는 땅만 없다뿐이지 바로 나네.” 이호재씨가 우스개를 던지자 전양자씨가 바로 받는다. “그런 사람만 있으면 당장 쫓아갈꺼야. 나 이래봐도 아직 솔로예요.” 오영수씨는 엄살을 부린다. “이만희 선생 <피고지고>에서도 비슷한 역을 맡았는데 아마 이 선생이 날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쓴 것 같아. 캬바레 왕으로 나오는데 왜 그런 것을 집어넣은지 모르겠네, 난 춤도 못 추는데….” 이호재씨의 친절한 귀띔이 이어진다. “원래 원작에 없던 것을 이만희 선생이 오영수가 자룡 역을 한다고 해서 일부러 춤추는 장면을 20분이나 넣었어.” 오씨의 걱정대로 오씨와 전양자씨의 탱고 장면 연습은 결국 연출가 위씨에게 몇차례 지적을 받았지만, 두 시간 연습은 그야말로 물 흐르듯 지나가고 있었다.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연극 ‘언덕을 넘어서 가자’ 연습현장
뒤풀이는 ‘각1병’, 안주는 추억담 연습이 끝나고 이호재씨의 제의로 근처 통닭집으로 옮기자마자 이씨의 그 유명한 ‘각 1병’이 시작됐다. 소주든 맥주든 음료수이든 각자가 1병씩 시켜서 서로 잔을 권하지 않고 스스로 따라 마시는 주법이다. 전양자씨는 <언덕을 넘어서 가자>가 “딱 나이에 맞아서 좋다”며 “실제 우리 세대에서는 좋아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하곤 했는데, 요즘 시대에는 아마 이런 사랑이 없을 것 같다”고 말문을 열었다. 오영수씨도 “인생을 오래 살면 깊은 맛이 있는데 요즘 대학로에 중년 이상 관객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작품이 너무 없는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동석한 이씨의 팬클럽 ‘빨간 소주’의 회장 이승무(57·의상 디자이너)씨가 “그러니까 설익은 후배들을 따끔하게 혼내려면 세 분이 자주 연극무대에 서시라”고 주문한다. 중견들은 나이가 들수록 열정이 더욱 강해지고 그래서 중진 자격을 가지는 듯했다. 세 사람 모두 더 많이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이야기를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전씨는 “2년에 한번”, 이씨는 “1년에 2편” 오씨는 “잡힌 일정말고 모노드라마 한번” 하는 것이 목표다. “옛날에는 많이 할 때는 1년에 아홉 작품도 뛰었어. 저녁에 공연하면서 오전에는 다른 작품 연습을 했지. 그때는 장기공연할 공연장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요즘 같아서야.”(이호재) “겨우 드라마센터나 명동 예술극장밖에 더 있었어요? 또 한 여름과 한 겨울에는 공연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극단이 3~5일 밖에 공연하지 못했어.”(오영수) 70~80년 연극의 황금시대가 언급되면서 ‘각 1병’이 ‘각 2병’, ‘각 3병’으로 늘어나고, 밤 깊은 대학로 골목을 떠도는 노배우들의 추억담이 그칠 줄 모른다. 정상영 기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