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숙/〈마음산책〉 대표·시인
문화읽어주는여자 = 정승운 ‘집꿈숲’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의식주가 충족된 다음에야 예술이 보인다고 말들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의 삶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무색해지는 경지와 만나게 된다. 김환기나 이중섭의 삶을 들여다보면 가난과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위대한 예술의 꽃을 피운 것을 볼 수 있다.
예술은 우리가 아는 어떤 현실적인 제약을 뛰어넘는 본원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이를 달리 말해 보면 어떤 작가들은 예술을 통해 우리 삶의 나락과 같은 일상성을 일깨우고, 우리를 원래 상태인 어떤 영혼의 깊은 속삭임 속으로 데려가는 메신저가 기꺼이 되어줌으로써 우리를 다시 살게 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시내에 있는 갤러리를 관람하는 일은 내게 늘 소중한 경험이었다. 시간을 제대로 내지 못할 때에는 벼락치기로 깜짝 관람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갤러리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눈과 마음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시내 복판의 빌딩 안에 있는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그 공간의 무성격함을 떨치고 생명력과 꿈을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이번엔 제대로 작정하고 서울 근교 파주 헤이리에 있는 소소 갤러리를 다녀왔다. 개관 작품전인 정승운의 ‘집꿈숲’을 보기 위해서였다. 아주 단순하게는 집, 숲이라는 낱말을 가지고 이렇게 웅숭깊고 다양한 다른 말들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주로 어떤 개념이든 언어를 통해 사유하는 내게는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 전시회였다.
우리는 개념을 통해 실제에 다가가기도 하지만 또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꿈의 내용들을 확장한다. 정승운 작가가 보여주는 ‘집’과 ‘숲’은 내게는 어떤 애잔한 꿈을 연상시킨다. 전시장에 놓여 있는 사물화된 작품을 관통하여 현상 그 너머를 보게 된다. 그것은 말이 시가 되고 말이 음률이 되는 순간을 연상하게 한다. 딱딱한 목재의 질감이 흡사 물렁한 회반죽처럼 느껴지고 어느새 우리의 꿈은 새로운 공간으로 날아간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아마 제각기 다르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나 내게는 아직 오직 않은 어떤 대상, 흡사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정거장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연상된다. 뜬금없게도 기형도의 시 〈정거장에서의 충고〉가 연상된다고 해도 좋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 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 놓는다.”
갤러리 소소는 작은 숲속 언덕배기에 위치해 있다. 그 언덕은 평안함을 안겨준다. 도회 한복판에 있는 갤러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정승운의 전시는 이런 공간과 걸맞게 낮은 목소리로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술의 힘이 있다면 이런 다정한 말 걸기 속에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정승운의 사유는 두텁거나 무겁지 않으면서 동시에 가볍지도 않은 사유다.
우리는 항상 마음의 안식을 구한다. 생활에서부터, 일에서부터 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도회의 공간에서부터. 그러나 안식할 만한 공간은 극히 적다. 마음은 당연히 환경의 제약을 받는다. 생각도 쉴 수 있는 거처가 필요하다. 그런데 어떤 매개체가 없으면 사유도 마음껏 꽃필 수가 없다. 사념만 생기고, 비관적인 생각만 생길 수 있다. 일상의 공간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여유까지 빼앗아가기가 보통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때론 도회지를 떠나 소요하듯이 감상하고 즐기는 전시를 보는 것이 좋겠다. 전시작품도 좋지만 전시공간이 더 위안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은숙/〈마음산책〉 대표·시인
정은숙/〈마음산책〉 대표·시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