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연극연출 외길 임영웅씨
50년 연극연출 외길 임영웅씨
깐깐하다. 배우들에게 한치 틈도 주지 않는다. 예술의 진정한 힘을 믿어온 칠순의 백전노장. 낮엔 ‘사랑과 우연의 장난’, 오후엔 ‘산불’ 연습현장을 오늘도 오간다. 그는 영원한 현역이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2층 연습실. 무대 왼쪽 한 귀퉁이에 두툼한 돋보기 안경을 걸친 한 백발의 노인이 대본에 코를 박고 앉아 있다가 이따금 슬며시 눈을 치켜뜨고 배우들을 ‘노려본다’. 배우들의 연기가 성에 차지 않는 듯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다신 뒤 대뜸 일성을 내지른다.
“이건 리얼한 분위기가 아니야. 희극이란 말이야. 꿈결을 바라보듯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보란 말이야!” 순간 연기에 빠져 있던 배우들이 멈칫하면서 주눅 든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참다못해 그가 무대로 나선다. “2막의 도랑트와 3막의 도랑트가 달라져야지. 자신의 신분을 고백했기 때문에 이제는 하인처럼 하면 안 돼. 좀 뻣뻣해도 된다고. 그런 것이 행동으로 나와야 한다고.”
한눈에 보기도 깐깐하다. 배우들에게 한 치 틈도 주지 않는다. 대사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지나칠 정도로 예술가의 고집스러움과 완벽함이 묻어난다. 임영웅(71·극단 산울림 대표)이라면 그럴 만하다. 50년이 넘도록 연출가의 외길을 걸어온 우리 연극계의 거목. 배우들을 혹독하게 몰아친다든지, 지독한 완벽주의자라는 등의 소문이 자자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연극을 하려면 독립운동 한다고 생각하고 해야 한다”며 예술의 진정한 힘을 믿어온 백전노장이다. 고희를 넘기고서도 여전히 현역인 그가 6월에만 두 작품의 연출을 맡았다. 오는 13일부터 7월1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올리는 프랑스 희극 〈사랑과 우연의 장난〉과 22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차범석 원작의 연극 〈산불〉. 그는 오전 10시쯤 남산 국립극장에 나가서 〈산불〉 연습을 지켜보다 오후 3시에는 강남 예술의전당으로 건너와 〈사랑…〉에 밤늦게까지 매달린다. 30~40대 젊은 연출가라도 버거운 일정이다.
〈산불〉은 그렇다 치고 리얼리즘 연극을 추구해온 그가 희극 〈사랑과…〉의 연출을 맡은 것은 조금 의아스럽다. “저에 대한 헛소문들이 많이 돌아서, 심각하고 진지하고 무게 잡힌 작품만 하는 것으로 인상이 남은 것 같아요. 생각하기에 따라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희극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어요. 38년간 〈고도…〉를 해오면서 나는 코미디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차원이 다른 코미디이기는 하지만….” 그는 “연출가에게는 비극이든 희극이든 형상화하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한다”며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희극 아닌 쪽의 작품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에둘러 말한다.
국내 첫선을 보이는 〈사랑과…〉는 18세기 프랑스 작가 마리보의 대표적인 희극으로 신분차별이 심했던 18세기 프랑스에서 정략결혼을 강요당한 두 젊은 귀족 남녀가 각각 하인과 하녀로 ‘역할 바꾸기 장난’을 하다가 진실한 사랑을 찾는 과정을 해학과 풍자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모처럼 연극무대에 돌아온 영화배우이자 탤런트 김석훈씨를 비롯해 김태범, 전진우, 최규하, 최광희, 이민정씨가 캐스팅됐다. “이 작품은 18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 젊은 남녀간의 사랑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 공연해도 전혀 시대적인 괴리가 없어요. 요즘도 결혼을 지위나 신분, 재산 등 세속적인 잣대로 재고 있지 않아요?”
배우들에게 늘 “연습한 것 이상 나오지 않는다”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그를 두고 김석훈씨는 “임영웅 선생님이 다른 연출가들과 다른 점은 정확하다는 것이다. 시간, 연출 느낌이 정확하고 깔끔한 걸 좋아하신다”며 “선생님께서 작품을 꿰뚫고 계시니까 마음이 편하다”고 귀띔한다.
그가 겹치기 연출을 맡은 〈산불〉은 우리나라 사실주의 연극의 백미로 평가받는 차범석의 작품이다. 2년 전 그가 국립극단의 ‘레퍼토리 복원 및 재창조 시리즈’로 국립극장 무대에 올려 화제를 모았다. 한국전쟁 기간에 남편을 잃은 과부들만 사는 한 마을을 배경으로 50년대 냉전 이데올로기적 갈등 상황에서 빚어지는 인간의 애욕과 갈등, 본능을 사실적이고 치밀하게 파헤쳤다. ↗
↗ 특히 지난 6일은 원작자인 차범석이 타계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어서 평소 절친했던 연극계 선배의 작품을 1주기 추모공연으로 올리는 그의 어깨가 무겁다. 또한 7월 초에는 〈산불〉을 원작으로, 칠레의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과 영국 출신 작곡가 에릭 울프슨, 연출가 폴 게링턴 등이 가세해 만든 뮤지컬 〈댄싱 섀도우〉 공연도 앞두고 있다. 〈산불〉을 뮤지컬 〈댄싱 섀도우〉로 각색한 도르프만이 방한 일정을 당겨 한국의 노연출가가 만든 〈산불〉을 보러 온다고 한다.
“도르프만이 〈산불〉이나 차범석이라는 작가의 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 〈산불〉은 공연될 때마다 작품이 왜곡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산불〉이 반공이 되기도 했어요. 〈산불〉은 이데올로기에 관계없이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고 극한 상황인가를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그는 “지금 생각해도 60년대에 〈산불〉을 공연한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일이었다”며 “다만 당시 검열 때문에 반공이 지나치게 강조된 것 같다”고 설명한다.
그는 하반기에는 그의 극단 산울림의 작품에 매달릴 계획이다. 8월 하순에는 1969년 초연 이후 38년간 ‘고도’라는 가상의 인물을 기다려온 대표작 〈고도…〉를 올리고 10월에 윤대성씨의 창작극 〈꿈꿔서 미안해〉, 12월에 김명화씨의 〈바람의 욕망〉을 차례로 산울림 소극장 무대에 올릴 계획이라며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며 밝게 웃는다.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예술의 전당 제공
〈사랑과 우연의 장난〉
한눈에 보기도 깐깐하다. 배우들에게 한 치 틈도 주지 않는다. 대사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지나칠 정도로 예술가의 고집스러움과 완벽함이 묻어난다. 임영웅(71·극단 산울림 대표)이라면 그럴 만하다. 50년이 넘도록 연출가의 외길을 걸어온 우리 연극계의 거목. 배우들을 혹독하게 몰아친다든지, 지독한 완벽주의자라는 등의 소문이 자자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연극을 하려면 독립운동 한다고 생각하고 해야 한다”며 예술의 진정한 힘을 믿어온 백전노장이다. 고희를 넘기고서도 여전히 현역인 그가 6월에만 두 작품의 연출을 맡았다. 오는 13일부터 7월1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무대에 올리는 프랑스 희극 〈사랑과 우연의 장난〉과 22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차범석 원작의 연극 〈산불〉. 그는 오전 10시쯤 남산 국립극장에 나가서 〈산불〉 연습을 지켜보다 오후 3시에는 강남 예술의전당으로 건너와 〈사랑…〉에 밤늦게까지 매달린다. 30~40대 젊은 연출가라도 버거운 일정이다.
〈산불〉
〈산불〉은 그렇다 치고 리얼리즘 연극을 추구해온 그가 희극 〈사랑과…〉의 연출을 맡은 것은 조금 의아스럽다. “저에 대한 헛소문들이 많이 돌아서, 심각하고 진지하고 무게 잡힌 작품만 하는 것으로 인상이 남은 것 같아요. 생각하기에 따라서 〈고도를 기다리며〉는 희극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어요. 38년간 〈고도…〉를 해오면서 나는 코미디를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차원이 다른 코미디이기는 하지만….” 그는 “연출가에게는 비극이든 희극이든 형상화하는 것은 똑같다고 생각한다”며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희극 아닌 쪽의 작품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에둘러 말한다.
국내 첫선을 보이는 〈사랑과…〉는 18세기 프랑스 작가 마리보의 대표적인 희극으로 신분차별이 심했던 18세기 프랑스에서 정략결혼을 강요당한 두 젊은 귀족 남녀가 각각 하인과 하녀로 ‘역할 바꾸기 장난’을 하다가 진실한 사랑을 찾는 과정을 해학과 풍자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모처럼 연극무대에 돌아온 영화배우이자 탤런트 김석훈씨를 비롯해 김태범, 전진우, 최규하, 최광희, 이민정씨가 캐스팅됐다. “이 작품은 18세기 프랑스 귀족 사회 젊은 남녀간의 사랑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지금 공연해도 전혀 시대적인 괴리가 없어요. 요즘도 결혼을 지위나 신분, 재산 등 세속적인 잣대로 재고 있지 않아요?”
50년 연극연출 외길 임영웅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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