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회 포스터
“중국국보전”에서 아들에게 들려준 말!
아버지가 초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딸을 데리고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역사탐방이 마음에 들지 않은 딸은 차라리 놀이동산에 가는 게 더 좋겠다고 푸념을 한다. 그 푸념을 묵묵히 듣고 있는 아버지는 딸이 이번 여행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꼈으면 하는 일념뿐이다. 화면이 바뀌면서 아버지와 딸은 경주의 불국사에 와 있고, 딸은 다보탑과 석가탑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다. 지루하게만 여겨졌던 역사의 현장은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가지런히 정돈되고 단청된 불국사의 처마 밑 담벼락을 따라 걸어오면서 딸은 아빠에게 말한다. “아빠, 나도 역사학자가 될까?”
얼마 전부터 텔레비전에 방송되고 있는 광고의 한 장면이다. 짧은 영상이지만 강렬한 감동을 전해주는 이 영상을 보면서 나는 늘 그 영상에 동화되곤 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이 작은 감동을 내 삶 속에서도 실현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휴일의 많은 시간들을 특별한 목적 없이 허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시간들이 아까워 뭔가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싶었지만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문제는 목적과 계획이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몇 주 전부터 깊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특별한 목적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면 휴일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문화, 역사 탐방을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그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행사치레 하듯이 다녀온 역사 기행들을 매주 일요일마다 실천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쉼도 필요하고, 또 결혼식과 같은 각종 경조사에도 참석해야하고, 어떤 때는 주말을 이용한 회의와 같은 모임들도 있기 때문에 휴일일지라도 그 휴일을 전적으로 또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일관되게 활용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예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할 일없이 허비되는 휴일의 시간들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반드시 문화, 역사 기행을 실현하자는 것이 나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또 다잡은 결과 드디어 지난 일요일에 아이의 손을 잡고 역사 기행에 나섰다. 목적지는 중국국보전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서울역사박물관. 교보문고를 가자는 제안에 흔쾌히 따라 나선 7살짜리 아들은 버스 안에서 역사박물관에 간다는 얘기를 듣고 이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교보나 영풍은 아이도 워낙 좋아해서 자주 데려갔었지만, 박물관은 지난 2004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에 첫 오픈을 했을 때 갔던 이래로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린 아론이에게는 무척 생소했을 것이다. 아마 역사라는 개념과 박물관이라는 개념이 낯설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리면서까지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아이를 맞이한 것은 세찬 소나기였다. 현대식 박물관의 모습을 보면 불평이 좀 수그러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내겐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엄청나게 퍼붓는 소나기 덕분에 박물관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론이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다행히 우산을 준비해 갔기 때문에 비를 맞지는 않았지만 역사 기행 첫날부터 난관이었다. 기차 안에서 딸이 아빠에게 불평하던 텔레비전 광고가 떠올랐다.
비를 피할 수 있게 천막으로 덮여진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들려주자 아론이의 마음이 약간을 누그러졌다. 상품권이나 티켓 등을 늘 좋아했기 때문에 아론이는 자신의 몫으로 지불된 표가 무척 소중했던 모양이다. 어린이 표라고 적힌 내용을 보이며 좋아했다. 특별히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 한 편에서는 경희궁의 전경과 김정호가 그린 서울시 지도, 어보, 편지지 등을 옛날 방식으로 프린트해 볼 수 있는 체험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옛 한지 한 봉투를 사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 아론이의 불평은 사라지고 박물관 기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박물관 측의 작은 배려가 이토록 고맙게 느껴질 수가 있을까? 그 세밀한 배려 덕분에 자칫 불평으로 가득 찰 수도 있었던 박물관 기행을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너무 너무 감사했다. 중국국보전에 들어서기 전에 영상물을 보니 이번 전시물 중에는 중국 호남성 장사시에 있는 마왕퇴 한묘(漢墓)에서 나온 2200년 전의 한나라 유물들이 다수 있었다. 화려한 채색감과 질감을 아직도 느낄 수 있는 비단 옷과 자수품들, 그리고 칠기 그릇과 술단지들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영상에서는 그 때 발굴 2천여 년 전의 미이라가 여전히 피부의 탄력을 잃지도 않은 채 보존되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보여주었다. 이 역사적 유물들을 포함해 중국의 한나라로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200여 년 동안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유물들, 그것도 중국의 국보급 유물들을 325점씩이나 한국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작은 행운이었다. 한중수교 15년을 맞이하여 양국 간의 우정을 보여준 뜻 깊은 행사였음에 틀림없었다. 아이와 함께 전시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중국 문화의 숨결이 느껴졌다. 총 5개의 전시관으로 꾸며진 이번 전시회는 한나라로부터 당나라에 이르는 중국 고대 문화의 걸작들로 채워졌다. 이 기간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적인 제국으로 우뚝 서는 시기였다. 한나라는 흉노, 선비 등 중국 변방의 세력들을 잠재우고,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등 중국을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세운 고대의 핵심 국가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름을 따서 중국의 문자를 한자(漢字)라고 하고, 중국의 의약을 한약(漢藥)이라고 한다. 물론 중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에 구체적으로 알려진 시기는 한나라 이전의 진나라 때였고, 그래서 세계인들은 중국을 China(Chin, 진)라고 부르고 있지만 중국의 문명이 통합되고 제국을 이룬 시기는 분명히 한나라였다. 그 한나라 이후 중국은 위진남북조시대(삼국시대와 동진, 5호 16국 시대 등)로 나뉘어졌다가 수문제에 의해 수나라로 통일되고, 약 40년 후에는 당나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일천 여년의 역사 속에서 중국은 자체의 문명과 북방 유목민족들의 문명을 통합하고, 나아가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 문명과 만나면서 최고의 중국 문명을 꽃피우게 된다. 그 고대 문명의 결실이 바로 당나라에 의해서 집대성되는 것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1관에는 한나라의 문명과 그 전통을 이어받은 위진남북조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별히 동한의 유물인 “행차의장 대열”과 “녹색 유약을 입힌 누각 모형” 등은 장대한 위용과 정교함으로 관객들을 압도시킨다. 박물관 기행이 익숙지 않은 아론이가 한 동안 유물 곁을 떠나지 않고 주변을 뱅뱅도는 모습을 보니 그 어린 아이에게도 그 섬세함과 정교함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았던 모양이다. 작은 크기이지만 금으로 덥혀진 “무덤을 지키는 금제 동물”은 금도금과 그 주변에 박힌 보석 장식들이 일품이었다. “황소 모양의 등”은 참으로 독특한 유물이었다. 등불을 켜기 위한 물건도 나름대로 예술성을 부여한 한나라 사람들의 노력이 엿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아론이에게 불을 켜는 등이라고 설명해주자, 어떻게 불을 켜느냐고 재차 물었다. 아마도 황소의 몸통에 기름을 넣고 등 위에 심지를 놓아서 불을 붙이면 등이 된다고 설명해주자, 그럼 꼬리는 무슨 용도냐고 물었다. 글쎄, 꼬리는 또 무슨 용도일까? 그건 그냥 장식인데 하려다가 그냥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짓고는 다음 유물로 이동했다. 2관에 들어서자 문명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별히 한나라는 북쪽의 유목민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하였다. 유목민족들이 강성할 때에는 나라가 위축되었다가 저들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면 강성해졌다. 이들 중 흉노족은 가장 주목할 만한 유목민족들이었다. 흉노는 고대 유목국가로서 한 때 한나라에 깊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훈족을 압박해 결국 훈족과 그에 의한 게르만민족들이 로마를 멸망시키는 대이동에 이르게 하였다. 오늘날 고대 유목국가로서 흉노의 역사는 시와다 이사오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흉노를 잠재움으로써 한은 제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와 북방 유목민족간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졌다는 사실을 유물들은 보여주고 있다. 페르시아의 유리 그릇들이 처음부터 그 사실들을 설명해 주었다. 도기로 만들어진 “문관상”은 북방 소수 민족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서위에서 만들어졌다. 이는 북방 소수 민족들이 한족 문화에 흡수된 자료로 보여진다. “채색한 서커스 인물상”은 한무제 당시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외국 서커스단을 초청해 공연했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 서커스단은 안식국, 즉 페르시아 국왕의 사절들이 알렌산드리아의 마슬사들을 데려와 마술 및 서커스를 보여주었다는 고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유물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문호교류의 현장인 실크로드, 그 실크로드에서 만날 수 있는 유물들이 3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만약 실크로드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아론이도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다고 떼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아이의 인식이 거기에 미칠 수 없었기에 마실 것이 필요하다고 떼를 쓰는 통에 잠시 쉬어가야 했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문명 앞에서 더는 주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람 마치고 맛있는 것 사 주겠다고 아이를 달래고는 유물들 앞에 섰다.“박산 모양을 한 향로,” “무덤을 지키는 천왕상” 등 국보급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실크로드의 의미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던 유물은 단연 비단이었는데, 이번에 전시된 유물들 가운데 시간의 얼굴을 가렸던 “얼굴 덮개,” “뿔을 든 여신과 용무늬를 염색한 직물” 등에서 비단위에 새겨진 문명을 볼 수 있었다. 특별히 뿔을 든 여신은 어린 제우스에게 젖을 먹인 아말테이아(산양)를 말하는 것으로서 동서 문명의 교류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의 교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북제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한 쌍의 미륵 반가상”은 북방민족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불교 유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은제 봉수병”에 그려진 ‘황금이야기’ 도안이 눈에 띈다. 그 자체가 페르시아풍 호병이었으며,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황금사과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것이 중국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누가 문명은 충돌하는 것이라 했던가? 문명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교류하면서 서로의 문명을 살찌우고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다. 물론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 문명은 상호 교류하는 것임을 중국의 남북방 문화의 만남이 보여주고 있다. 아이에게는 힘들었겠지만 나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던 곳이 바로 3관이었다. 이 3관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걸까? 이제는 아이보다도 내가 더 지친 듯했다. 한 동안 다소 지루해하던 아론이는 조금 쉬고 난 후 마음의 여유를 찾았는지 다시 활기찬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좀 쉬고 다음 내용들을 관람하자고 했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둘러볼 테니까 아빠는 그냥 앉아있으라 한다. 그 아이의 눈에는 정말 뭐가 보일까? 4관과 5관은 당나라의 풍류와 은치를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물론 당나라의 탁월한 문화유물에 비교한다면 작품 자체는 매우 수수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미 다른 곳에서 감동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4관에 들어서자마자 동서문명 교류사의 대형 걸작품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바로 “한백옥 관 덧널”이었다. 관을 옮겨다 놓았기 때문에 크기도 크기려니와 그 관의 덧널 벽들에 그려진 그림들이 압권이었다. 산서성 태원시 우홍묘(虞弘墓)에서 발굴된 이 관은 매우 이국적인 색체가 뚜렷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설명을 살펴보니 페르시아의 왕관과 조로아스터교의 상징들이 들어 있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들은 조로아스터교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었다. 돈황 문서 등에 따르면 중국에 자리 잡은 소그드 촌락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이 있었다는데 이 유물이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전시회 안내문을 보면 이번 전시회의 팁(Tip)으로 미녀와 야수(美와 獸)를 소개하고 있다. 야수의 모습들은 앞 선 전시관들에서 많이 보았는데 미녀는 이곳에서 비로소 볼 수 있었다. “비단 치미를 입은 여인상”은 당나라의 미학을 이해하게 해주는 매우 뛰어난 작품이었다. 아론이에게 예쁘냐고 묻자 색이 아름답다는 반응이 온다. 인물의 아름다움은 몰랐던 걸까 관심이 없었던 걸까? 아마도 인물은 자기의 미학 기준에 맞지 않았나보다. 그래도 색깔이 아름답다는 말에서 당나라 미학이 어느 정도 체면은 유지한 것일지도 모른다. 색상과 자태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 유물에서 우리는 당나라의 화장법과 옷매무시 등을 엿볼 수 있다. 장보고의 역사를 다룬 해신이라는 영화에서 채시라와 수아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나와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을 보면서 그 때의 부정적 생각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미에 대한 욕구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는데, 지금 좀 더 아름답게 보이고자 꾸민 것이 뭐 그리 잘못된 것일까? 이 유물 앞에서 겸손을 배웠다. 5관에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은 유물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엎드린 신하 모습의 인물상”이었다. 어쩜 그토록 생생한 표정을 1,200여 년 동안 간직해 두었다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까? 작품을 만든 사람의 긴 안목이 부러울만큼 작품의 느낌은 감동적이었다. 양귀비를 사랑한 당 현종의 큰형인 이헌의 능묘인 혜릉에서 발굴된 이 유물은 발굴책임자를 놀라게 했다. 유물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록했단다. “처음 무덤에 들어서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먼지로 덮여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나서 붓질을 시작하자 서서히 신하의 모습이 드러났다.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 나는 털썩 주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살아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혼란 속에 빠져 버렸다.”(섬서성 고고연구소 발굴책임자 장유엔 실장) 정말 살아 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살아 있고, 그 문관은 죽어 있는 것일까?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나의 감정과 지조를 비웃듯 1,200여 년을 한결같은 충심으로 우주를 받드는 그가, 아니 그의 정신이 진정 살아 있는 것 아닐까? 역사는 살아 있었다. “아론아, 역사는 살아 있는 거란다!” 나는 아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것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아이는 다 봤으니 서둘러 나가서 맛있는 거 사달라고 보챘다. 전시실을 나오면서 메모판에 아론이로 하여금 글을 남기게 하고는 감동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전시실을 나섰다. 아직도 빗줄기가 세차게 퍼붓고 있는 박물관 입구에 서서 아론이를 쳐다보았다. 텔레비전의 광고에서처럼 감동을 받은 채 “아빠, 나도 역사학자 될까?”라는 반응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저 철부지 아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비가 내려서 시원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빨리 비가 그쳐야 맛있는 밥을 먹으러 갈 텐데 하는 아쉬움에 빠져 있을까? 혹시 내가 오늘 말해 준 최고의 말, “역사는 살아있는 거란다”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전시회에서 느낀 감동과 아이에 대한 기대감과 미련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묵묵히 서서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비를 피할 수 있게 천막으로 덮여진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들려주자 아론이의 마음이 약간을 누그러졌다. 상품권이나 티켓 등을 늘 좋아했기 때문에 아론이는 자신의 몫으로 지불된 표가 무척 소중했던 모양이다. 어린이 표라고 적힌 내용을 보이며 좋아했다. 특별히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 한 편에서는 경희궁의 전경과 김정호가 그린 서울시 지도, 어보, 편지지 등을 옛날 방식으로 프린트해 볼 수 있는 체험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옛 한지 한 봉투를 사서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 아론이의 불평은 사라지고 박물관 기행을 즐기기 시작했다. 박물관 측의 작은 배려가 이토록 고맙게 느껴질 수가 있을까? 그 세밀한 배려 덕분에 자칫 불평으로 가득 찰 수도 있었던 박물관 기행을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너무 너무 감사했다. 중국국보전에 들어서기 전에 영상물을 보니 이번 전시물 중에는 중국 호남성 장사시에 있는 마왕퇴 한묘(漢墓)에서 나온 2200년 전의 한나라 유물들이 다수 있었다. 화려한 채색감과 질감을 아직도 느낄 수 있는 비단 옷과 자수품들, 그리고 칠기 그릇과 술단지들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영상에서는 그 때 발굴 2천여 년 전의 미이라가 여전히 피부의 탄력을 잃지도 않은 채 보존되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보여주었다. 이 역사적 유물들을 포함해 중국의 한나라로부터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1,200여 년 동안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유물들, 그것도 중국의 국보급 유물들을 325점씩이나 한국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작은 행운이었다. 한중수교 15년을 맞이하여 양국 간의 우정을 보여준 뜻 깊은 행사였음에 틀림없었다. 아이와 함께 전시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중국 문화의 숨결이 느껴졌다. 총 5개의 전시관으로 꾸며진 이번 전시회는 한나라로부터 당나라에 이르는 중국 고대 문화의 걸작들로 채워졌다. 이 기간은 중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적인 제국으로 우뚝 서는 시기였다. 한나라는 흉노, 선비 등 중국 변방의 세력들을 잠재우고, 실크로드를 개척하는 등 중국을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세운 고대의 핵심 국가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름을 따서 중국의 문자를 한자(漢字)라고 하고, 중국의 의약을 한약(漢藥)이라고 한다. 물론 중국이라는 나라가 세계에 구체적으로 알려진 시기는 한나라 이전의 진나라 때였고, 그래서 세계인들은 중국을 China(Chin, 진)라고 부르고 있지만 중국의 문명이 통합되고 제국을 이룬 시기는 분명히 한나라였다. 그 한나라 이후 중국은 위진남북조시대(삼국시대와 동진, 5호 16국 시대 등)로 나뉘어졌다가 수문제에 의해 수나라로 통일되고, 약 40년 후에는 당나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일천 여년의 역사 속에서 중국은 자체의 문명과 북방 유목민족들의 문명을 통합하고, 나아가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 문명과 만나면서 최고의 중국 문명을 꽃피우게 된다. 그 고대 문명의 결실이 바로 당나라에 의해서 집대성되는 것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1관에는 한나라의 문명과 그 전통을 이어받은 위진남북조시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별히 동한의 유물인 “행차의장 대열”과 “녹색 유약을 입힌 누각 모형” 등은 장대한 위용과 정교함으로 관객들을 압도시킨다. 박물관 기행이 익숙지 않은 아론이가 한 동안 유물 곁을 떠나지 않고 주변을 뱅뱅도는 모습을 보니 그 어린 아이에게도 그 섬세함과 정교함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았던 모양이다. 작은 크기이지만 금으로 덥혀진 “무덤을 지키는 금제 동물”은 금도금과 그 주변에 박힌 보석 장식들이 일품이었다. “황소 모양의 등”은 참으로 독특한 유물이었다. 등불을 켜기 위한 물건도 나름대로 예술성을 부여한 한나라 사람들의 노력이 엿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아론이에게 불을 켜는 등이라고 설명해주자, 어떻게 불을 켜느냐고 재차 물었다. 아마도 황소의 몸통에 기름을 넣고 등 위에 심지를 놓아서 불을 붙이면 등이 된다고 설명해주자, 그럼 꼬리는 무슨 용도냐고 물었다. 글쎄, 꼬리는 또 무슨 용도일까? 그건 그냥 장식인데 하려다가 그냥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짓고는 다음 유물로 이동했다. 2관에 들어서자 문명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별히 한나라는 북쪽의 유목민족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하였다. 유목민족들이 강성할 때에는 나라가 위축되었다가 저들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면 강성해졌다. 이들 중 흉노족은 가장 주목할 만한 유목민족들이었다. 흉노는 고대 유목국가로서 한 때 한나라에 깊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는 훈족을 압박해 결국 훈족과 그에 의한 게르만민족들이 로마를 멸망시키는 대이동에 이르게 하였다. 오늘날 고대 유목국가로서 흉노의 역사는 시와다 이사오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흉노를 잠재움으로써 한은 제국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와 북방 유목민족간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해졌다는 사실을 유물들은 보여주고 있다. 페르시아의 유리 그릇들이 처음부터 그 사실들을 설명해 주었다. 도기로 만들어진 “문관상”은 북방 소수 민족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서위에서 만들어졌다. 이는 북방 소수 민족들이 한족 문화에 흡수된 자료로 보여진다. “채색한 서커스 인물상”은 한무제 당시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외국 서커스단을 초청해 공연했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 서커스단은 안식국, 즉 페르시아 국왕의 사절들이 알렌산드리아의 마슬사들을 데려와 마술 및 서커스를 보여주었다는 고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유물이다. 인류 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문호교류의 현장인 실크로드, 그 실크로드에서 만날 수 있는 유물들이 3관에 전시되어 있었다. 만약 실크로드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아론이도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다고 떼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아이의 인식이 거기에 미칠 수 없었기에 마실 것이 필요하다고 떼를 쓰는 통에 잠시 쉬어가야 했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문명 앞에서 더는 주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람 마치고 맛있는 것 사 주겠다고 아이를 달래고는 유물들 앞에 섰다.“박산 모양을 한 향로,” “무덤을 지키는 천왕상” 등 국보급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실크로드의 의미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던 유물은 단연 비단이었는데, 이번에 전시된 유물들 가운데 시간의 얼굴을 가렸던 “얼굴 덮개,” “뿔을 든 여신과 용무늬를 염색한 직물” 등에서 비단위에 새겨진 문명을 볼 수 있었다. 특별히 뿔을 든 여신은 어린 제우스에게 젖을 먹인 아말테이아(산양)를 말하는 것으로서 동서 문명의 교류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실크로드를 통한 문명의 교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이 있었다. 북제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한 쌍의 미륵 반가상”은 북방민족의 영향을 살펴볼 수 있는 불교 유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은제 봉수병”에 그려진 ‘황금이야기’ 도안이 눈에 띈다. 그 자체가 페르시아풍 호병이었으며,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황금사과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것이 중국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문화교류가 활발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누가 문명은 충돌하는 것이라 했던가? 문명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교류하면서 서로의 문명을 살찌우고 풍성하게 해주는 것이다. 물론 충돌이 있었지만 결국 문명은 상호 교류하는 것임을 중국의 남북방 문화의 만남이 보여주고 있다. 아이에게는 힘들었겠지만 나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던 곳이 바로 3관이었다. 이 3관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 걸까? 이제는 아이보다도 내가 더 지친 듯했다. 한 동안 다소 지루해하던 아론이는 조금 쉬고 난 후 마음의 여유를 찾았는지 다시 활기찬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좀 쉬고 다음 내용들을 관람하자고 했더니 이번에는 자기가 둘러볼 테니까 아빠는 그냥 앉아있으라 한다. 그 아이의 눈에는 정말 뭐가 보일까? 4관과 5관은 당나라의 풍류와 은치를 느낄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물론 당나라의 탁월한 문화유물에 비교한다면 작품 자체는 매우 수수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이미 다른 곳에서 감동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아쉬움은 크지 않았다. 4관에 들어서자마자 동서문명 교류사의 대형 걸작품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바로 “한백옥 관 덧널”이었다. 관을 옮겨다 놓았기 때문에 크기도 크기려니와 그 관의 덧널 벽들에 그려진 그림들이 압권이었다. 산서성 태원시 우홍묘(虞弘墓)에서 발굴된 이 관은 매우 이국적인 색체가 뚜렷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설명을 살펴보니 페르시아의 왕관과 조로아스터교의 상징들이 들어 있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들은 조로아스터교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었다. 돈황 문서 등에 따르면 중국에 자리 잡은 소그드 촌락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이 있었다는데 이 유물이 그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전시회 안내문을 보면 이번 전시회의 팁(Tip)으로 미녀와 야수(美와 獸)를 소개하고 있다. 야수의 모습들은 앞 선 전시관들에서 많이 보았는데 미녀는 이곳에서 비로소 볼 수 있었다. “비단 치미를 입은 여인상”은 당나라의 미학을 이해하게 해주는 매우 뛰어난 작품이었다. 아론이에게 예쁘냐고 묻자 색이 아름답다는 반응이 온다. 인물의 아름다움은 몰랐던 걸까 관심이 없었던 걸까? 아마도 인물은 자기의 미학 기준에 맞지 않았나보다. 그래도 색깔이 아름답다는 말에서 당나라 미학이 어느 정도 체면은 유지한 것일지도 모른다. 색상과 자태는 정말 아름다웠다. 이 유물에서 우리는 당나라의 화장법과 옷매무시 등을 엿볼 수 있다. 장보고의 역사를 다룬 해신이라는 영화에서 채시라와 수아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나와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었는데 이 작품을 보면서 그 때의 부정적 생각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미에 대한 욕구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는데, 지금 좀 더 아름답게 보이고자 꾸민 것이 뭐 그리 잘못된 것일까? 이 유물 앞에서 겸손을 배웠다. 5관에서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은 유물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엎드린 신하 모습의 인물상”이었다. 어쩜 그토록 생생한 표정을 1,200여 년 동안 간직해 두었다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을까? 작품을 만든 사람의 긴 안목이 부러울만큼 작품의 느낌은 감동적이었다. 양귀비를 사랑한 당 현종의 큰형인 이헌의 능묘인 혜릉에서 발굴된 이 유물은 발굴책임자를 놀라게 했다. 유물에 대해 그는 이렇게 기록했단다. “처음 무덤에 들어서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먼지로 덮여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고 나서 붓질을 시작하자 서서히 신하의 모습이 드러났다.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 나는 털썩 주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살아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혼란 속에 빠져 버렸다.”(섬서성 고고연구소 발굴책임자 장유엔 실장) 정말 살아 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살아 있고, 그 문관은 죽어 있는 것일까?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나의 감정과 지조를 비웃듯 1,200여 년을 한결같은 충심으로 우주를 받드는 그가, 아니 그의 정신이 진정 살아 있는 것 아닐까? 역사는 살아 있었다. “아론아, 역사는 살아 있는 거란다!” 나는 아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것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내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아이는 다 봤으니 서둘러 나가서 맛있는 거 사달라고 보챘다. 전시실을 나오면서 메모판에 아론이로 하여금 글을 남기게 하고는 감동의 역사를 뒤로 한 채 전시실을 나섰다. 아직도 빗줄기가 세차게 퍼붓고 있는 박물관 입구에 서서 아론이를 쳐다보았다. 텔레비전의 광고에서처럼 감동을 받은 채 “아빠, 나도 역사학자 될까?”라는 반응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저 철부지 아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비가 내려서 시원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빨리 비가 그쳐야 맛있는 밥을 먹으러 갈 텐데 하는 아쉬움에 빠져 있을까? 혹시 내가 오늘 말해 준 최고의 말, “역사는 살아있는 거란다”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전시회에서 느낀 감동과 아이에 대한 기대감과 미련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묵묵히 서서 비가 멎기를 기다렸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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