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숙진 ‘버려진 나무와의 만남 20년-뉴욕작업’전
조숙진 ‘버려진 나무와의 만남 20년-뉴욕작업’전
수명 다한 쓰레기들 오브제 삼아
삶과 죽음을 한 공간에 버무려내
뉴욕 활동 작가의 첫 국내 개인전 지리산 촛대봉에서 제석봉 사이 고사목 지대. 죽은 나무들이 별빛과 비바람에 씻기면서 우두커니 세월을 톺아오른다. 이끼도 새도 없고 총성과 화약 냄새, 심지어 연륜조차 번잡스럽다. 그 가운데 들어선 유기물 인간은 ‘앗뜨거라’ 깊게 침잠하거나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부조화가 힘겨운 탓이다. 중진 조각가 조숙진(47)씨가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지하에 벌인 ‘버려진 나무와의 만남 20년※뉴욕작업’ 전시회(8월31일~9월30일). 홍수에 떠내려온 나무줄기, 부러진 식탁과 망가진 책상 다리가 얼기설기 엮여 있거나 지게차용 팰릿, 썩은 기둥들이 놓이고 걸려 있다. 오브제들은 모두 버려졌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언뜻 쓰레기 하치장처럼 보이는 전시장이 소도처럼 성스럽게 느껴진다. ‘남동생의 파수꾼’(사진). 뉴욕 등지에서 여러 차례 변주됐던 이 설치조각은 한 달 정도 걸려 완성한 국산품. 두어 주일 동안은 수도권 일대 쓰레기장, 폐자재 창고, 하천의 하류천변 등지를 돌며 폐가구와 나무졸가리를 모아들였다. 그 가운데 쓸 만한 것을 뽑아내 한주일 꼬박 지하실에서 세워 박고 잇는 작업. ‘버려진’ 것들, 즉 수명을 다한 나무졸가리들은 홍수의 흙탕물에 궁글려 자연의 껍질을 벗었고, 역할을 마친 폐자재(의자·책상다리, 계단 난간 등)들은 인공의 맥락을 벗어나 나무 목(木)으로 돌아섰다. 각기 머금은 출처의 잔흔은 토막토막 잘리고 그 영역에서 추상의 시간은 맥을 못 춘 채 가뭇없이 사라지고 없다. 대저 추상은 일상의 구상에서 뽑아낸 인간 정신의 정수. 하지만 작가의 손에서 완성된 추상은 버려진 것, 곧 일상의 아래에서 길어올린 만큼 출처와 그 위상의 격절이 ‘보통 추상’의 두 배다. 그 탓이다. 멍한 충격 가운데서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엄청난 간극을 가진 생과 사가 한 공간에 버무려져 구별 자체가 속절없어지기 때문. 가운데 씨앗처럼 박힌 목마. 그리고 무심코 놓아둔 듯한 어린이용 의자와 롤러스케이트 조각. ‘어려서 잃은 남동생에 대한 기억’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 싶을 뿐. 뻔뻔함, 죄스러움, 서로에 대한 낯섦이 소멸하는 공간과 다르지 않다. 작가는 1988년 뉴욕으로 간 뒤 광주비엔날레에 잠깐씩 얼굴을 내밀었을 뿐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도미 이태 뒤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여덟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뿐 아니라 브라질, 인도 등 여러 곳에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로스앤젤레스 메트로 교도소 앞 광장에 108개의 종으로 된 ‘위싱 벨/투 프로텍트 앤드 투 서브〉(Wishing Bell/To Protect and To Serve)를 진행하고 있다. 미술 전문잡지 〈아트 투데이〉에 ‘이달의 작가’로, 미술 전문지 〈스컬프처〉에 작가론 특집으로 다뤄진 바 있다. 함께 전시하는 ‘명상을 위한 작업’ 등 세 작품은 지게차용 팰릿과 썩은 나무기둥 등으로 만들었고 ‘비석 풍경/존재는 비존재로부터 태어난다’는 한 변이 둥그스름한 판자 조각의 조합, ‘천국의 창문은 열려 있다’는 버려진 창틀 다섯 개와 나무의자 두 개의 조합이다. 뉴욕에서 공수되는 과정에서 운송회사한테서 “작품은 무슨 작품… 쓰레기던데”라는 말을 들었다는 후문. 전시장을 돌아보고 난 뒤 관객의 반응은 두 가지. 감동을 먹고 나오거나, 작품은 어디 있느냐며 영문 몰라하거나.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삶과 죽음을 한 공간에 버무려내
뉴욕 활동 작가의 첫 국내 개인전 지리산 촛대봉에서 제석봉 사이 고사목 지대. 죽은 나무들이 별빛과 비바람에 씻기면서 우두커니 세월을 톺아오른다. 이끼도 새도 없고 총성과 화약 냄새, 심지어 연륜조차 번잡스럽다. 그 가운데 들어선 유기물 인간은 ‘앗뜨거라’ 깊게 침잠하거나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부조화가 힘겨운 탓이다. 중진 조각가 조숙진(47)씨가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지하에 벌인 ‘버려진 나무와의 만남 20년※뉴욕작업’ 전시회(8월31일~9월30일). 홍수에 떠내려온 나무줄기, 부러진 식탁과 망가진 책상 다리가 얼기설기 엮여 있거나 지게차용 팰릿, 썩은 기둥들이 놓이고 걸려 있다. 오브제들은 모두 버려졌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언뜻 쓰레기 하치장처럼 보이는 전시장이 소도처럼 성스럽게 느껴진다. ‘남동생의 파수꾼’(사진). 뉴욕 등지에서 여러 차례 변주됐던 이 설치조각은 한 달 정도 걸려 완성한 국산품. 두어 주일 동안은 수도권 일대 쓰레기장, 폐자재 창고, 하천의 하류천변 등지를 돌며 폐가구와 나무졸가리를 모아들였다. 그 가운데 쓸 만한 것을 뽑아내 한주일 꼬박 지하실에서 세워 박고 잇는 작업. ‘버려진’ 것들, 즉 수명을 다한 나무졸가리들은 홍수의 흙탕물에 궁글려 자연의 껍질을 벗었고, 역할을 마친 폐자재(의자·책상다리, 계단 난간 등)들은 인공의 맥락을 벗어나 나무 목(木)으로 돌아섰다. 각기 머금은 출처의 잔흔은 토막토막 잘리고 그 영역에서 추상의 시간은 맥을 못 춘 채 가뭇없이 사라지고 없다. 대저 추상은 일상의 구상에서 뽑아낸 인간 정신의 정수. 하지만 작가의 손에서 완성된 추상은 버려진 것, 곧 일상의 아래에서 길어올린 만큼 출처와 그 위상의 격절이 ‘보통 추상’의 두 배다. 그 탓이다. 멍한 충격 가운데서 삶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엄청난 간극을 가진 생과 사가 한 공간에 버무려져 구별 자체가 속절없어지기 때문. 가운데 씨앗처럼 박힌 목마. 그리고 무심코 놓아둔 듯한 어린이용 의자와 롤러스케이트 조각. ‘어려서 잃은 남동생에 대한 기억’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 싶을 뿐. 뻔뻔함, 죄스러움, 서로에 대한 낯섦이 소멸하는 공간과 다르지 않다. 작가는 1988년 뉴욕으로 간 뒤 광주비엔날레에 잠깐씩 얼굴을 내밀었을 뿐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도미 이태 뒤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20년 동안 여덟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뿐 아니라 브라질, 인도 등 여러 곳에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로스앤젤레스 메트로 교도소 앞 광장에 108개의 종으로 된 ‘위싱 벨/투 프로텍트 앤드 투 서브〉(Wishing Bell/To Protect and To Serve)를 진행하고 있다. 미술 전문잡지 〈아트 투데이〉에 ‘이달의 작가’로, 미술 전문지 〈스컬프처〉에 작가론 특집으로 다뤄진 바 있다. 함께 전시하는 ‘명상을 위한 작업’ 등 세 작품은 지게차용 팰릿과 썩은 나무기둥 등으로 만들었고 ‘비석 풍경/존재는 비존재로부터 태어난다’는 한 변이 둥그스름한 판자 조각의 조합, ‘천국의 창문은 열려 있다’는 버려진 창틀 다섯 개와 나무의자 두 개의 조합이다. 뉴욕에서 공수되는 과정에서 운송회사한테서 “작품은 무슨 작품… 쓰레기던데”라는 말을 들었다는 후문. 전시장을 돌아보고 난 뒤 관객의 반응은 두 가지. 감동을 먹고 나오거나, 작품은 어디 있느냐며 영문 몰라하거나.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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