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최재은 20년 작품세계 ‘루시의 시간’전
‘저토록 작은 체구에서 이토록 큰 프로젝트가 어떻게 나왔을까?’
9월 21일부터 11월 18일까지 로댕갤러리(삼성생명 본관 1층)에서 여는 ‘최재은: 루시의 시간’에 전시된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 〈별을 바라보다〉 〈순환〉 〈루시〉 등의 작품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규모가 장대하고 의미가 깊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루시’(바탕 사진). 239.5×246×291.4㎝ 크기, 한백옥을 얇게 갈아 만든 육각형을 이어붙인 조형물이다. ‘루시’는 1974년 에티오피아 하다르 계곡에서 발견된 318만년 전 두 발로 걸었던 최초의 여성 인류 화석의 이름. 발굴 당시 유행하던 비틀스의 〈루시 인 더 스카이 위드 다이아몬즈〉란 노래에서 따온 이름이다. 루시의 발견은 인류 진화의 수수께기를 풀어 줄 열쇠를 제공했다. 화산폭발로 열대우림과 평원 지대가 분리되면서 침팬지와 인간이 분리되었고, 루시는 평원 쪽을 택해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최재은이 주목하는 것은 다름 아닌 300만년. 그는 백옥(白玉)의 조형물을 세(三) 발을 달아 세움으로써 300만년을 상징하고 싶었을까.
직립보행 최초 인류 ‘루시’ 형상화하고
세계 10곳에 종이 묻어 ‘세월’을 파내
‘순환의 역사’ 성찰한 종합예술적 세계
작가가 루시에게 주목한 것은 케냐에서 진행한 〈마사이 마라〉 작업 때문. 이 작업은 최씨가 1986년에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는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 시리즈의 일환. 이 작업은 손으로 만든 일본종이 ‘화지’를 방부 처리해 타임캡슐처럼 땅속에 일정기간 묻었다가 다시 꺼내어 종이 외부의 변화와 내부의 상태를 분석하는 것이다. 당시 모친상을 당한 작가가 흙이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라고 깨달은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경주 토함산을 시작으로 일본,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케냐 등 10개에 묻었다. 5~10년 뒤에 꺼내본 종이는 각 지역의 흙이 스며들고 그곳의 미생물이 번식하면서 그곳의 색으로 채색돼 ‘그림’이 돼 있었다. 이는 땅밑작업으로써 지구의 역사를 써보겠다는 야심이었다. 〈마라이 마라〉는 15년 전에 묻은 종이가 그곳의 지형·지질 변화로 화석이 되어 발굴됐던 작업. 그로 인해 전지구적인 스케일이 300년 세월의 깊이를 파는 ‘루시’로 연결되었던 거다.
〈월드 언더그라운드 프로젝트〉가 곁가지를 친 게 미생물의 세계. 전문가들과 어울려 작업하기를 즐기는 작가는 종이 속의 미생물을 배양하여 현미경으로 촬영하는 과정에서 또다른 소우주를 봤다. 노벨 화학상을 받은 일리야 프리고진의 카오스 이론에 깊게 공감하면서 생각은 심화되었고 예술과 과학을 접목한 〈엔트로피〉(1993), 〈자기조직화〉(1993), 〈카오스〉(1994), 〈미크로-매크로〉(1995) 등으로 작품화됐다. 특히 〈미크로-매크로〉는 한국인으로 일본 대표가 되어 베니스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인데, 한국적 색으로 된 플라스틱 외부와 미생물을 확대한 사진을 전시한 내부를 대조시켜 화제를 모았다.
작가가 이처럼 거대한 ‘시공간 놀이’를 하게 된 데는 일본의 꽃꽂이 ‘이케바나’라는 뜻밖의 배경이 있다. 작가 최재은의 존재는 1976년 일본으로 건너가면서부터 비롯한다. 그는 ‘일본의 바우하우스’ 소게쓰에서 이케바나를 배웠다. 이는 식물을 자르고 꺾고 연결해 극도로 절제된 공간미를 보여주는 일본의 전통문화. 자연스러움에 익숙한 한국인으로서 나무에 몹쓸 짓을 하고 그나마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게 항상 부담이었다. “자르지 않고 생명을 순환하게 하겠다”는 자신의 철학을 정립한 그는 작은 공간에서 야외의 거대공간으로 뛰쳐나갔다. 그 결과물은 환경조각.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앞에 거목을 심고 그 둘레에 철판으로 4×4×8m의 집을 짓고는 나뭇가지의 방향에 따라 문을 냈다.(〈과거미래〉) 유기물을 우선하는 무기물과 유기물의 결합이었다. 경동교회에서 보여준 〈동시다발〉(1990)도 비슷하다. 교회 옥상 ‘예술가를 위한 공간’에 수천 개의 대나무를 줄로 연결해 ‘슬플 정도로 삭막한’ 서울의 도시공간에 거대한 일본식 꽃꽂이를 보여주었다.
경동교회는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 대가의 작품을 이렇게 재탄생시킨 예는 1985년 일본에서 보여준바 있다. 유명한 조각가 노구치 이사무의 작품 〈천국〉에 13톤의 검은 흙을 쏟아부어 덮고 씨앗을 뿌렸던 것.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이울면서 탄생, 성장, 소멸하는 생명의 메커니즘을 눈으로 보여주었다.(〈대지〉) 그 작업이 쉬웠겠는가. 자존심 강한 작가의 작품 위에서 ‘노는’ 것이. 반년을 설득했다고 하니 작가의 끈기 한번 알아줄 만하다.
건축과도 같은 규모의 거대함과 섬세하고 치밀한 조형성. 조각, 설치, 영상 등 장르를 넘나드는 종합예술적 세계. 예술과 과학의 접목, 시간과 존재의 철학적 성찰 등으로 국제무대에서 주목받아온 작가의 작품은 삼성서울병원의 〈시간의 방향〉(1995), 해인사에 설치한 성철스님 사리탑 〈선의 공간〉(1998)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다.
이번 전시회는 최재은의 20년 작품세계의 뿌리와 의미를 한눈에 담고자 하는 자리다. 유기물의 탄생과 소멸을 암실에서 우주적으로 펼쳐보인 〈순환〉, 운모가루와 초침소리로 내면의 이미지를 보여준 백색공간의 〈자신〉이 아주 대조적이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세계 10곳에 종이 묻어 ‘세월’을 파내
‘순환의 역사’ 성찰한 종합예술적 세계
위부터 ‘월드 언더그라운드-마사이 마라’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 ‘별을 바라보다’
작가가 이처럼 거대한 ‘시공간 놀이’를 하게 된 데는 일본의 꽃꽂이 ‘이케바나’라는 뜻밖의 배경이 있다. 작가 최재은의 존재는 1976년 일본으로 건너가면서부터 비롯한다. 그는 ‘일본의 바우하우스’ 소게쓰에서 이케바나를 배웠다. 이는 식물을 자르고 꺾고 연결해 극도로 절제된 공간미를 보여주는 일본의 전통문화. 자연스러움에 익숙한 한국인으로서 나무에 몹쓸 짓을 하고 그나마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게 항상 부담이었다. “자르지 않고 생명을 순환하게 하겠다”는 자신의 철학을 정립한 그는 작은 공간에서 야외의 거대공간으로 뛰쳐나갔다. 그 결과물은 환경조각.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앞에 거목을 심고 그 둘레에 철판으로 4×4×8m의 집을 짓고는 나뭇가지의 방향에 따라 문을 냈다.(〈과거미래〉) 유기물을 우선하는 무기물과 유기물의 결합이었다. 경동교회에서 보여준 〈동시다발〉(1990)도 비슷하다. 교회 옥상 ‘예술가를 위한 공간’에 수천 개의 대나무를 줄로 연결해 ‘슬플 정도로 삭막한’ 서울의 도시공간에 거대한 일본식 꽃꽂이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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