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 사람들’
예술의전당의 ‘자유젊은연극’은 새로운 연극을 지향하는 젊은 연극인들에게 실험의 장을 선사하는 매력적인 프로젝트다. 올해 주인공은 <삼등병> <조선형사 홍윤식> 등 최근 발 빠른 행보로 개성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신예 성기웅으로, 1930년대의 경성을 재현한 <소설가 구보씨와 경성 사람들>이 선정되었다.
그런데 패기만만한 젊은 예술가들은 때로는 감당하기에 너무 큰 작품에 도전했다 혼쭐이 나기도 하는 법이다. 2막 6장, 두 시간 반에 이르는 이 거대한 작품과 씨름하면서 성기웅과 젊은 배우들은 꽤 노력했지만 고전한 눈치다. 공연은 아직 비등점에 이르지 못한 채 가능성만 보여주고 있다.
우선 긍정적인 가능성. 이 작품은 구보 박태원의 하루를 소재로 삼아, 박태원이 삶 속에서 어떻게 창작의 소재를 취했는지를 여섯 개의 에피소드로 보여주고 있다. 월북 작가로 우리에게 비교적 늦게 알려진 박태원은 서구적 근대가 일상으로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한 1930년대의 경성을 정밀하게 담아낸 작가로 평가받는다. 제작진은 그런 박태원의 삶과 실제 그의 작품을 축으로 삼아 1930년대의 경성을 명랑하게 재현했다.
덕분에 관객은 식민지 시절 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당위의 모습이 아니라 채플린 영화를 보고 일본말을 하고 카페여급과 사랑을 속삭이던 그 시절의 구체적인 일상과 혼란을 경험하고, 깍쟁이 같은 당시의 언어를 듣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작품을 쓰고 연출한 성기웅은 자막까지 활용하면서 관객에게 낯선 언어와 풍습을 설명할 정도로 세심하였고-덕분에 극장은 일순간 공부방이 되는 듯도 하였다!-, 또 박태원의 소설 문장을 그대로 들려주면서 1930년대의 경성만이 아니라 그 시절을 정밀하게 관찰했던 예술가의 창작혼도 함께 복원하고자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연극은 어디까지나 연극일 뿐이다. 사라진 예술가와 시대를 복원하려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연극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한 설익은 의도가 될 뿐이다. 읽을 때와 달리 들을 때 현저하게 집중력이 떨어지는 소설의 문장을 무대에서 제대로 극화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소극장도 채우지 못하는 젊은 배우들의 약한 존재감을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지, 구체적인 말로 표현되지 않더라도 극본 속에 작가가 마련한 식민지 조선의 우울함과 예술혼을 어떻게 구체적인 이미지로 시각화할 것인지 연극성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공연은 아직 그 지점까지 가지 못했다.
막이 오른 뒤 작품을 제대로 고치는 것은 사막에 물길을 내듯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때로 젊음은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 아직은 공연 초반, 막이 내리려면 시간이 남았다. 돌진하시길.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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