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연극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라주모프스카야가 쓰고 최범순이 연출한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에 ‘존경’은 없다. 선생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간 제자들은 곧 본색을 드러내고 잘못 본 졸업시험의 점수를 고치기 위해 엘레나 선생을 유혹하고 협박하고 회유하고 폭력과 기만도 서슴지 않는다.
작품의 배경은 페레스트로이카 이전의 옛 소련. 작가는 중년의 선량한 여선생과 십대 후반의 제자 4명을 대치시키는 간단한 구도로 한 시대의 혼란과 붕괴를 날카롭게 진단해낸다. 정의를 믿으며 밤새도록 학생들과 사투를 벌이는 엘레나 선생이 구시대의 이상과 가치관을 대변하는 존재라면, 제자들은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처럼 자본주의의 거대 물결 앞에 맥을 못 추고 쓰러지는 옛 소련에 일말의 존경심도 갖지 못하는 신세대, 살아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의 화신들이다. 그런데도 과연 희망은 존재할까.
투비컴퍼니가 제작한 이 작품은 동숭동 외곽의 조그마한 소극장에서 공연 중이고(축제소극장 11월25일까지), 요즘의 관객들이 좋아하는 화려한 무대나 스타급 연기자를 기용하지도 않았으며,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한 연출가나 배우들이 만든 견고한 무대도 아니었다. 그러나 작품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제기, 또 현실의 혼란과 맞서려는 치열함으로 서투름을 일정 부분 상쇄하였고, 오랜만에 소극장 연극이 주는 진정성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덕분에 처음엔 화술도 정확하지 않고 감정선도 단선적인 젊은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하지 못하던 객석도 차츰 공연의 열기에 동화되어 갔고,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미리 대리체험하고 성찰하게 해주는 연극 고유의 참맛과 직면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젊은 세대가 인본주의를 포기하는 미래의 날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대 위의 저 폭력이 나에게 닥친다면 굴복할 것인가, 힘의 논리만 앞세우며 지금 극장 밖에서 진행 중인 세계의 저 불쾌한 변화에 이렇게 속수무책 손을 놓고 있어도 되는가. 제작진은 존경받지 못하는 엘레나 선생님의 평온한 집을 짓부수면서, 심지어 무대에 머무르지 않고 배우들이 객석으로 돌진하면서 관객들의 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뒤흔들어 놓았다.
최근 한국 연극계는 관객의 공연문화에 대한 관심 속에 점점 화려해지고 대형화되는 추세다. 이 가을만 보더라도 국제공연예술제와 대규모의 뮤지컬 제작, 해외 연극인과의 합작 등 외형적으로 연극은 점점 다양해지고 세련되고 화려해진다. 문제는 그 틈바구니에서 그 동안 한국 연극의 대들보 역할을 했던 소극장 연극이 점점 관객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며 왜소해지거나 상업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그런 시절이어서인지 상업성과 무관한 작품을 선택하고 서툴지만 치열했던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은 반갑고 고맙다. 소극장 연극, 기운 내라!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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