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놀이 ‘쾌걸박씨’
세모라 마음이 분주하다. 대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연극계는 편을 가르고 싸우는 이 남성적 정치의 계절에 여성적 연극으로 한 해를 마감할 눈치다. 결혼한 여자들의 제도 밖의 사랑을 다룬 작품들, 역사적 인물인 <명성황후>의 재공연, 고전 속의 여걸인 박씨 부인과 효녀 심청마저 시간을 초월해 무대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마치 이런 현상은 예술이 자신 안의 여성적 충동에 기대어 부박한 현실,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배제해야 하는 남성적 현실정치를 견뎌내려는 것처럼도 읽힌다.
이 가운데 배삼식이 극본을 쓰고 손진책이 연출한 문화방송 마당놀이 <쾌걸박씨>는 대중성 있는 형식으로 세모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프로그램을 살펴보니 마당놀이가 벌써 27년의 역사를 맞이했단다. 신념도 유행처럼 쉽게 바뀌는 한국적 패러다임을 생각할 때, 27년이라면 꽤 일관성 있는 역사다. 그 긴 역사가 가능했던 것은 마당놀이가 가진 특성이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관중과 무대가 활발하게 교감하는 편안한 숨쉬기,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는 질펀한 농지거리와 현실 풍자의 힘, 한국적 가무와 신명, 쇼에 가까울 정도의 화려한 의상과 스펙터클한 볼거리 등등. 예술 지향적이거나 인문학적 깊이가 있는 연극을 중시했던 기존 연극사의 관점에서는 폄하될 수 있지만, 창극이나 여성 국극처럼 화려한 연극성으로 관중을 매혹했던 한국적 대중연극의 계보로는 의미있는 시도다.
올해 새롭게 선보인 <쾌걸박씨>는 여성이 중심이 되는 동서의 고전을 융합한 마당놀이다. 극본을 쓴 배삼식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못생긴 외모지만 나라를 구하는 여걸 박씨부인의 이야기와 남편들에게 성파업을 일으켜 남성적인 전쟁의 영토에 평화를 가져온 서양의 원조급 정치 코미디 <리시스트라테>를 결합하였다. 병자호란에서 조선을 누른 청국의 여인들이 박씨부인의 도움을 받아 성파업을 일으켜 평화를 얻는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국회에서도, 혹은 저 멀리 중동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는 없을까. 예술은 그렇게 엉뚱한 꿈으로 현실을 비틀고 조롱하고 뛰어넘는다!
<쾌걸박씨>는 몇년 전부터 마당놀이에 가세한 젊은 작가 배삼식과 더불어 새롭게 안은미의 안무, 이경섭의 음악을 추가하면서 세대교체를 예고하고 있다. 동서 고전을 융합한 작품 스타일이나 현대적인 안무, 또 기존의 걸걸한 희극성에 서정미를 추가하는 장면(명마를 위한 노래)은 이번 마당놀이의 새로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작품이 탄탄한 레퍼토리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장황한 전반부, 두 개의 고전을 융합하느라 분산되어진 초점을 유기적으로 재조율해야 할 것이다.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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