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한 시장에 산뜻한 동화가 ‘왁자’
서울 동화시장 공공미술 프로젝트
젊은 작가 11명 손잡고 두달간 작업
의류부자재 상가를 동화처럼 채색
젊은 작가 11명 손잡고 두달간 작업
의류부자재 상가를 동화처럼 채색
거인이 있었다. 그의 취미는 모으기. 그는 단추, 지퍼, 실, 리본, 구슬, 핫픽스 등을 잔뜩 모아 개미굴 공간에 쌓아놓았다. 어느 날 거인이 떠나고, 그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골무와 바늘, 재봉틀, 프레스로 물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웃이 생기고 장터가 생겼으니 그게 동대문 의류 부자재 도매시장인 동화(東和)시장이다.
죽이 맞는 젊은이 11명이 이런 황당한(?) 동화(童話)를 썼다. 서울시에서 공모한 동화시장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하나로 10~11월 두 달에 걸쳐 칙칙한 동화시장을 동화나라로 바꿔놓았다. ‘동화찾기-세상의 모든 의류부자재 동화에서 찾다’.
동화시장은 1968년 신축 당시 남산에서도 뚜렷이 보이는 지상 표지물이었다. 39년이 흐른 지금 두타, 밀리오레 등 화려한 상가가 솟아오르면서 그늘에 가려 아는 사람만 찾는 시장이 됐다. 5층 콘크리트 건물에는 630개 상점이 개미굴처럼 다닥다닥 입주해 가게마다 직원 서너명이 형광등 아래서 의류 부자재를 만들고 판다. 각종 파이프가 드러나 지나가고 바닥, 계단은 닳고닳아 반들거린다.
젊은 예술인들이 주목한 곳은 계단과 방화문 그리고 옥상.
계단은 대기와 사람들이 순환하는 곳. 층계가 끝나는 곳에 화장실을 거느리고 있다. 젊은 예술가들은 시장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 수밖에 없는 화장실에 주목했다.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로 하고 3층과 5층 계단 좌우에 알록달록 동화를 그렸다. 그림에는 바늘을 입에 문 거인여성, 뱀으로 변하는 넥타이, 춤추는 실타래 등 고단한 상인들의 일상을 소재로 이야기가 그득하다. 스쳐가는 회색빛 통로가 환한 이야기를 머금은 공간이 됐다. 곁에 놓인 오래된 자판기가 새 옷을 입고, 앉으면 감겨들 듯한 손잡이의 노란색 의자도 놓였다. 계단 바로 옆 기둥에는 시멘트에서 솟아난 다섯 손가락. 약지에 반창고가 감기고 새끼손가락 손톱에 반짝이 그림이 그려졌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반창고가 왜 감겨있지? 벗겨야 하는데 안 벗긴 거 아냐?” “많이 다치는 손가락이 검지인데 왜 약지에 반창고가 감긴 거야?”
방화문에는 시장 사람들 표정에서 잡아낸 조각그림 200여개로 만든 모자이크가 생겼다. 경비원 박수길씨와 ‘동원프레스’ 안주인 김옥선씨를 모델로 만든 전신상은 방문객에게 수줍은 말을 건넨다. “남들이 닮았다고 합디다만 내가 알게 뭐여?” 김옥선씨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표정에는 은근짜 자부심이 묻어났다.
가장 심혈을 기울인 곳은 옥상. 전체 예산 9천만원 가운데 반 이상이 들었다. 녹색우레탄 칠을 한 바닥에 흡연실이 고작이던 썰렁한 공간에 커다란 단추 모양 의자와 그늘이 생기고 나무도 한 그루 심었다. 바닥에는 역시 동화. 아래층에서 옥상을 뚫고 솟아나온 실타래에서 싹이 돋아나고, 그 식물은 줄기를 뻗어 여기저기를 휘감고 가로질러 저쪽 옥상바닥 한가운데서 화사한 꽃을 피웠다. 또 다른 자투리 옥상인 ‘지퍼쉼터’. 리본, 넥타이 형상의 알록달록 바닥을 지퍼가 열면 녹색 잔디가 돋아난다. 물론 지퍼는 벤치도 된다.
“분위기가 밝아져 상인들이 무척 좋아해요. 봄이 되면 손님들도 더 많아지지 않을까요?” ‘팡팡자수’ 김옥숙(42)씨는 이번 작업에 아주 만족해 했다. 그는 공공미술의 일부인 ‘동화(動花)시장, 움직이는 꽃이 되어라’ 콘테스트에 자수작품을 내 부상으로 밥통을 받았다. 자기 이름을 소재로 의류 부자재를 사용해 에이4 크기 작품을 만들라는 주문에 상호 ‘팡팡’을 수놓았다. 김씨를 비롯한 45명이 55개 작품을 내어 한바탕 전시회도 열었다.
“회색공간을 화사하게 바꾼 외에 이곳 분들에게 이야깃거리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어요. 하루종일 일만 하고 일 외에는 얘기가 별로 없어요. 호칭도 김씨 박씨, 사장님이구요.” 이 작업을 주도한 ‘플래닝 미도’ 라윤주(28) 실장은 프로젝트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11명으로 꾸려진 팀한테 주어진 시간은 상인들이 퇴근한 저녁 6시부터 시작해 다음날 아침 9시까지. 밤샘을 거듭하면서 동화시장은 흑백에서 컬러 동화로 바뀌어갔다. 처음 설문조사를 할 때는 상인들이 상대를 안 해줘 고생했다. 고심 끝에 비상책, ‘구운 달걀 프로젝트’. 구운 달걀 3천여개를 준비해 고양이 가면을 쓴 팀원들이 상가를 돌면서 버리는 자재와 물물교환을 했다. 서먹하던 분위기가 확 바뀌어 이야기가 오가고 간식거리가 오갔다. 밤샘으로 꾸벅꾸벅 조는 젊은 예술인에게 잠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저희가 떠난 뒤에 더 많은 이야기가 생겨났으면 해요.”
라 실장은 자신들이 한 것보다 더 많은 아이디어와 정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작업하는 동안 정말 행복했다면서.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계단 바로 옆 기둥에는 시멘트에서 솟아난 다섯 손가락. 약지에 반창고가 감기고 새끼손가락 손톱에 반짝이 그림이 그려졌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반창고가 왜 감겨 있지? 벗겨야 하는데 안 벗긴 거 아냐?” “많이 다치는 손가락이 검지인데 왜 약지에 반창고가 감긴 거야?”
젊은 예술가들은 상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층계와 그 끝자락 화장실에 주목했다.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로 하고 좌우에 알록달록 동화를 그렸다.
경비원 박수길씨와 ‘동원프레스’ 안주인 김옥선씨를 모델로 만든 전신상은 방문객에게 수줍은 말을 건넨다. “남들이 닮았다고 합디다만 내가 알 게 뭐여?” 김옥선씨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표정에는 은근히 자부심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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