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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나의 피아노, 나를 살게 하네

등록 2008-01-17 19:49

암은 그에게서 “삼손처럼 치렁치렁하던 머리카락”을 앗아갔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숏커트’로 무대에 서는 것은 24년 만에 처음이다.
김경호 기자 <A href="mailto:jijae@hani.co.kr">jijae@hani.co.kr</A>
암은 그에게서 “삼손처럼 치렁치렁하던 머리카락”을 앗아갔다. 피아니스트 서혜경이 ‘숏커트’로 무대에 서는 것은 24년 만에 처음이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암 투병 끝 ‘재기 무대’ 서는 피아니스트 서혜경
1년여 항암치료·수술 뒤 첫 공연
‘승부욕 불타던 완벽주의’ 버리고
“생의 환희·풍요로움 연주하고파”

삶과 죽음의 경계엔 ‘열정’의 꽃이 핀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았다”는 자각이다. 병과의 처절한 사투 끝에 얻어지는 삶에 대한 의지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기 어렵다.

1년여의 암 투병 끝에 새 생명을 얻은 피아니스트 서혜경씨. 서울시내 한 호텔의 31층 라운지에서 만난 그는 몹시 들떠 있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와요, 너무 아름답잖아요. 그저 행복하고 감사해요. 살아 있다는 것이, 그리고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것이.” 그는 노래하듯이, 높은 톤으로 말했다.

암세포는 오른쪽 가슴과 어깨, 겨드랑이까지 퍼져 있었다. 수술하면 피아노를 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의사들은 화를 냈다. 지금 사느냐 죽느냐 하는 마당에 무슨 피아노 타령이냐고. 그에게 피아노의 존재는 그만큼 무거웠다. 처음에 수술을 피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수술받기 전, 그는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치다가 통곡하고 말았다. 이렇게 소중한 오른팔을 잃을 수 있다니, 기가 막혔다. 죽음의 그림자와 처음 맞닥뜨린 것은, 항암치료 중 머문 지리산에서였다. 1983년 뮌헨 콩쿠르 우승 뒤 24년 동안 한번도 자르지 않고 길러 왔던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삼손처럼 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온다”고 믿었던 그는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꼈다.

다행히 그의 오랜 팬이 수술을 맡았고, 수술실에선 그의 피아노 소품집 〈보석상자〉가 흘렀다. 베버의 ‘무도회의 권유’ 덕분인지 차분하게 수술을 마치고 의식을 찾았을 때, 서씨는 손가락부터 꼼지락거렸다. 기뻤다. 팔을 뻗어봤다. 찌릿찌릿하지만 견딜 만했다. ‘완쾌’ 판정을 받은 것은 지난해 8월 초였다.

젊었을 때도 그는 큰 시련을 겪었다. 1980년 세계적 권위의 부조니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한 뒤 세계무대로 막 뻗어나가려 할 때였다. 오른팔에 갑자기 근육마비 증세가 생겼다. 연습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쉬면 낫는 병’이라고 했다. 2년 이상 피아노를 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어려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자전거를 타고 청계천에 나가봤어요. 바람이 좋았어요. ‘지금까지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구나’, 저 자신을 용서했어요. 승부욕에 불타던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버렸죠. 여유 있게 즐기면서 살려고요.”

그러나 피아노에 대한 열정만은 버릴 수 없었다. 몸을 추스르자마자 연주 계획을 잡았다. “다들 미쳤다고 하죠. 암 수술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큰 공연을 하느냐고. 하지만 전 피아노를 치기 위해 살아난걸요.”

스스로 “기적 같은 재기 무대”라고 말하는 이번 공연에서 그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과 3번을 케이비에스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한다. 항암치료와 함께 찾아온 불청객,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 곡들이다. 올해는 〈보석상자〉 2집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전곡 등 녹음작업에 주력할 예정이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사람으로서 생의 풍요로움과 환희를 팬들께 들려드리고 싶어요. 우린 모두 시한부 인생이잖아요.” 22일 저녁 8시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1577-5266.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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