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1954년) -하
[세상을 바꾼 노래] 빌 헤일리의 <록 어라운드 더 클락>(1954년)-하
청소년 문화의 탄생과 로큰롤의 부상 사이 상호연관성은 특정한 시공간적 배경에서 양립했다. 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이다. 경제성장과 베이비붐이 일으킨 시너지가 버팀목이었다. 그로써 여가시간과 여윳돈을 갖게 된 50년대의 미국 청소년들은 ‘호모 루덴스(유희의 인간)’의 본능을 완벽하게 체현한 인류 첫 세대로 등장했던 것이다.
빌 헤일리(1925~1981)는 그 같은 변화의 움직임을 누구보다 일찍 감지한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본래 컨트리 뮤지션이었다. 그러나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까지 지방 라디오방송국의 디제이로 일하며 젊은 백인대중의 음악적 취향이 인종의 장벽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3살 때부터 돈을 받고 노래 부르는 일을 시작한 베테랑이었음에도 헤일리는 변신을 주저하지 않았다. 1951년부터 그는 트레이드 마크이자 클리셰였던 카우보이 모자를 벗어 던지고 리듬 앤 블루스 스타일에 천착했다. 그러므로 헤일리가 처음 녹음한 흑인음악 넘버가, 샘 필립스로부터 “최초의 로큰롤 레코드”라 일컬어졌던 재키 브렌스튼의 <로켓 88>이었다는 사실은 필연적 상징성을 갖는다.
비평가 닉 토스키스는 이 시기의 빌 헤일리를 <록 어라운드 더 클락>으로 ‘대박’을 터뜨린 이후의 그보다 높게 평가했다. 그는 헤일리가 “로큰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2년쯤 전에 이미 로큰롤 역사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구현했다”고 주장했다. 멤피스 슬림, 지미 프레스턴, 조 터너 등 흑인 뮤지션의 곡들을 자신의 음반에 담아냄으로써 빌 헤일리가 로큰롤에 대한 주류 백인관객의 형성에 기여했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엘비스가 등장할 무대를 마련해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빌 헤일리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등장과 함께 과거의 인물로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록 어라운드…>가 청소년들을 열광시키고 있던 무렵에 이미 헤일리는 삼십대로 접어든 세 아이의 아빠였다. 로큰롤이라는 새로운 어법과 문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기성세대였다는 것이다. 비평가 닉 콘은 그것이 “잔인한 반전”이었다면서도 헤일리가 본인이 만들어낸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썼다. 실제로 헤일리는 1955년 발간한 악보집에서 “우리는 컨트리 음악에 사용하는 악기로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했고 그 결과로 ‘팝 음악’이 나왔다”고 말했다. 맙소사! 정작 그는 자신이 본격 로큰롤의 시대를 개막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였다.
따지고 보면 <록 어라운드…>와 빌 헤일리를 둘러싼 모든 정황이 과도기적 혼재 양상이었다. 청소년 비행에 대한 염려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하는 영화 <폭력교실>이 정작 문제의 원천으로 지목된 로큰롤을 배경음악 삼은 것이 그랬고, 그 결과로 극장마다 청소년들이 폭동에 가까운 소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랬으며, 로큰롤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상승한 것이 그랬다. 로큰롤에 대한 청소년의 열광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지속될 로큰롤에 대한 기성세대의 몰이해도 빌 헤일리와 <록 어라운드…>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박은석/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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