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리아 에보라(67)
‘맨발의 디바’ 세자리아 에보라 내달 내한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 떠 있는 섬나라 카보베르데. 세네갈에서 수백㎞나 떨어져 있는 이 군도에는 애초 아무도 살지 않았다. 1456년 포르투갈인들이 발견해 차지한 뒤, 아프리카 흑인들이 농장 노예로 끌려왔다. 카보베르데의 슬픈 식민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아프리카의 빌리 홀리데이라 하는 세자리아 에보라(67·사진)는 바로 이들의 후예다. 다음달 내한 공연을 앞둔 그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나는 내 나라와 나의 뿌리인 아프리카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또한 내가 아프리카 여자인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내 나라, 카보베르데는 정말 가난한 나라이지만 나에게는 매우 특별하고 자랑스러운 곳입니다.”
아프리카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마흔일곱에 ‘월드뮤직의 메카’ 파리로 날아가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지만, 그는 한번도 카보베르데를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는 “지금도 고향에서 자녀들과 형제들, 조카와 손자들과 함께 대가족”으로 살고 있다.
그가 노래하는 ‘모르나’는 슬픈 역사만큼이나 애잔한 정서를 지닌 이 나라의 전통음악이다. “모르나는 카보베르데 사람들의 감성을 담고 있는 음악이에요. 사랑, 그리움, 이별 그리고 일상의 순간 순간 느끼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죠. 한마디로 여러 가지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좀 슬프거나 우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카보베르데 사람들은 본디 아주 즐겁고 쾌활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음악 안에서 더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태어나고 자란 항구 마을 민델로에서 그는 꽤 유명한 가수였다. 음악을 사랑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16살 때부터 광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색소폰 연주가인 남동생과 함께였다. 저녁이면 클럽에서 노래를 하고, 밥을 얻어먹었다. 그러나 1975년 카보베르데가 포르투갈에서 독립하면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이 계속되자 더는 카페에서 노래할 수 없게 됐다. 폭음과 무절제한 생활로 10년 넘는 세월을 보낸 그는 세차례 이혼 끝에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댔다. 그러다 1987년, 운명이 바뀌게 된다. 그의 목소리에 매혹된 프로듀서 조제 다 실바를 만난 것이다. 파리에서 낸 첫 앨범의 제목이 〈맨발의 디바〉였다.
“처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부터 맨발로 노래를 했어요. 이유는 단순해요. 신발을 싫어하기 때문이에요. (웃음) 첫번째 음반의 타이틀이 ‘맨발의 디바’였고 그 이미지가 강해서 사람들이 저를 계속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요.”
그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두번째다. 첫 내한 공연은 한 대학 강당에서 진행했는데 공연장 사정이 좋지 않아 애를 먹었다고 한다. 국내 최고 수준의 시설을 자랑하는 극장에서 열리는 이번 공연에서는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될 것 같다. 그는 “공연장이 좋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보다는 관객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앨범인 〈로가마르〉에 있는 실린 곡들과, ‘베사메무초’, ‘앙골라’ 등 인기곡들을 부를 예정이다. 3월 19일 저녁 8시 엘지아트센터. (02)2005-0114.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엘지아트센터 제공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사진 엘지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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