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햄릿’
연극은 공룡처럼 변화가 더딘 보수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비분강개하며 부도덕한 권력과 싸우는 강성의 예술이기도 하다. 그 반골의 예술이 진보가 표류하던 지난 십 년간 할 말을 잃고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 대중성과 감각을 따라잡느라 공룡처럼 뒤뚱거리기만 하더니, 새 정권이 들어서고 새싹이 돋아나는 이 봄날에 느닷없이 <햄릿> 돌풍을 일으키는 중이다. 극단 골목길의 가난한 <햄릿>, 뮤지컬 <햄릿>, 설치미술을 끌어들인 , 국립극단이 재해석한 <햄릿>.
물론 이 현상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 그저 우연이다. 그러나 우연의 반복은 필연의 조짐 아닌가. 기성세대의 부도덕과 죽을 때까지 맞섰던 <햄릿>의 연이은 호출은 그동안 방향감각을 상실했던 연극이 ‘이제 그만 정신 차리겠다’는 각오로 다가온다. 대중성과 말초적 감각 대신 셰익스피어라는 원점으로 회귀하겠다는 것, 세상과 맞섰던 햄릿 정신을 회복하겠다는 의지 말이다.
그 중 동구권 특유의 깊이로 품격 있는 뮤지컬을 선보인 <햄릿>은 그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상업예술의 장 안에서 시도되었다는 점 때문에 더 의미 있다. 햄릿의 반골 정신과 록 음악을 결부시킨 야넥 레데츠키의 음악은 놀랍게도 중후했고, 감각적인 잔재주를 피우느라 햄릿의 분노와 절망을 놓치지 않았다. 대신 그 우직한 깊이에 회전무대의 속도감과 원작의 골격을 능란하게 연결시키는 재구성력으로 관객을 사로잡고, 박진감에 현기증이 날 때쯤 공중에서 하강하는 오필리어의 죽음처럼 처연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여 시적인 리듬감과 강약을 조절하였다.
아마도 이번에 재공연되는 뮤지컬 <햄릿>이 더욱 극적 완성도를 갖출 수 있었던 데에는 작품에 대한 해석력과 연극적 숨쉬기를 알고 있는 김광보 연출을 영입한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김광보는 서두르지 않았고 절제력있게 호흡을 조절하면서 햄릿(고영빈·김수용)의 비장미를 차근차근 구축해 나갔다. 그리하여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는 <햄릿>의 마지막 노래를 들을 때쯤에는 웅장한 감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비록 라이센스 뮤지컬이긴 하지만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로 흥행에 골몰하던 뮤지컬계의 관행이 최근 현실 비판적이거나 고도의 형식미를 갖춘 예술 작품으로 잇따라 선회하는 듯한 현상은 반가운 일이다(<스위니 토드>, <헤어 스프레이>, <나인> 등등). 키치가 예술의 진정성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는 말은 이럴 때 적용되는 것이리라.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