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블로그] 친구가 가수가 된다는 것, 가수인 친구가 있다는 것

등록 2008-03-11 14:22수정 2008-03-11 14:48

그들이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즐거워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많은 관객들이 공감하는 대체적 평가다. 출처:문화방송
그들이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즐거워하는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많은 관객들이 공감하는 대체적 평가다. 출처:문화방송
건강 챙겨라. 나도 예전같지는 않더라.
잘 지내라 친구야. 목소리 들었으니 됐다.
열심히 해라. 잘 안된다고 기죽지는 말고.
널 믿는다, 친구야. 누가뭐래도 난 네 편이다.
- 스○소○○ 2집 가사 중에서

새로 산 음반을 한참 흥얼거리며 듣다가…뜨끔했다. '허걱'했다. 얼랄라? 왠지 익숙한 내용이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인 듯도 하고… 친구와 전화통화 때마다, 내가 하는 '대사'인 듯도 싶고…

몇 해 전 친구는 말했다. "언제 한번 네 얘기를 노래로 만들고 싶다니까." 만약 이게 그 결과라면, '네 얘기'라는 게 결국 이런 잔소리였단 뜻? 친구에게 결국 나는 잔소리 대마왕?? 푸하핫!

길거리에서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생기기까지

지금은 길거리에서 친구를 알아보고 사인해달라는 사람도 있단다. 9시간을 기다려 이들을 만나고 돌아간 팬도 있었다고 했다. 적어도 내겐 격세지감이다. 기쁜 일이다.


내가 기억하기론, 그와 벗들이 뭉쳐 활동해 온 지는 이미 10년 안팎이다. 그 이전 저마다 추구해 왔을 '음악의 길'을 제외한 햇수다. 대중과 만나는 음악으로 활동하는 본격적인 '가수'가 된지는 길어야 3~4년을 넘지 않는다. 더욱이 평소 사람들이 알아보는 '인기 연예인'(?)이 된 건 정말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이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이었던 가수 신해철이 그들에게 처음 내린 평가는 “세련된 외국팀”이었다. 출처: 문화방송
이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이었던 가수 신해철이 그들에게 처음 내린 평가는 “세련된 외국팀”이었다. 출처: 문화방송
지난해 방송된 한 공중파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결정적으로 널리 알려지는 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형기획사 중심으로 꾸려진 연예계에서, 이미 데뷔했지만 뜨지 못한 가수들에게 무대에 설 기회를 주는 '착한' 프로그램이었다. 출연 가수들에겐 발전적 평가를 받는 '재발견'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없어진 이 프로그램에서, 친구가 속한 남성 쿼텟(4인조)은 매번 호평을 받았다. "더이상 이런 곳에 나오지 마라"는 평가도 있었다. 실력은 충분하니 더 큰 무대로 나가란 극찬이었다.

더 길게 본다면, 2006년 한 드라마 주제곡을 부르면서부터 인기를 얻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혼한 남녀의 재결합을 다룬 16부작 이 드라마는 매회 10~20% 사이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주제곡의 인기도 높았다. 밑도 끝도 없이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이라고 반복하는 이 노래를 들어본 사람들은, 그 다음 한마디를 기다렸다. 글쎄… 노래 끝까지 제대로 밝혀지진 않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전화연결음, 벨소리를 장식했다.

더더욱 길게 보자면, 그들은 2004년 한 가요제에서 대상을 얻어 실력을 입증했다. 이내 기획사가 생겼다. 번듯한 연습실에 들어갔다. 큰 무대에 설 기회가 생겼다. 많은 가수들의 공연에 게스트로 등장했다. 이듬해 11월엔 첫음반을 세상에 내놨다. 팬클럽의 결성 및 활동이 본격 시작됐다. 종종 라디오에 게스트로 출연해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인기가 많든 적든 변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 그 이전에도 친구와 그의 쿼텟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클럽 등 작은 무대를 전전하던 시절이었다. 손님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그들을 좇아, 지인들은 불편을 아랑곳 않았다. 다니던 학교를 중심으로 무대 경험의 폭을 넓히던 시절도 있었다.

90년대 후반까지 가보면, 그들은 가요제에 참가하는 등 처음으로 가요계의 문을 두드렸다. 댄스 일색이었던 당시 가요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잠시 꿈을 미루고 군대로 달려가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룹을 이루지 않은 적도 있었다. 처음 그들의 인연은 정장에 넥타이 차림으로 중후한 노래를 불렀던 남성 합창단 단원 4명이었다.

대중적으로 유명세를 타기까지 친구는 꾸준히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내겐 변함없는 사실이 있다. 줄곧 나의 친구였다는 점이다. 인기가 많았어도, 적었어도, 혹은 없었어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때에도 그는 내 친구였다.

가수가 되려고 준비하는 친구

지금은 "내 친구 중에 가수 있어"라고 말해도 괜찮겠지만, 첫 앨범을 내기까지 그는 "가수가 되려고 준비하는 친구"였다. 학교와 클럽의 작은 무대에서 간간이 그들을 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주변 지인들의 축가를 전담하기도 했다. 그들에겐 주요 수입원이었다.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내심 뿌듯했다. 난 음악을 잘 모르지만,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들이 '정말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 넷이서 힘줘 부르는 노래에선, 노랫말과 음율을 위해 혼신을 짜낸 정성이 엿보였다. 무대 위에서 친구는 정말 즐거워보였고, 노래하는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네 사람은 늘 정장과 넥타이 차림으로 학교 안팎의 무대에 섰던 한 대학 남성합창단 출신이다. 출처: 2007년 정기공연 홍보 동영상 (http://video.naver.com/2007050903025279753)
네 사람은 늘 정장과 넥타이 차림으로 학교 안팎의 무대에 섰던 한 대학 남성합창단 출신이다. 출처: 2007년 정기공연 홍보 동영상 (http://video.naver.com/2007050903025279753)

노래하고 싶은 꿈과, 경제적 여건이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친구는 술 한잔 들어가면 자신감 없는 풀죽은 말투로 아현동 '골방 연습실'을 묘사했다. 좁은 방에서 다큰 남정네 넷이 땀을 뻘뻘 흘리는 얘기였다. 그들은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친구가 자랑스러웠다. 어떻게든 도움이 돼주고 싶었다. "그래도 넌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잖니"라는 영양가 없는 위로가 전부였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했다.

친구가 가수가 된다는 것

2004년 ㅇ가요제에서 대상을 탔다는 소식을 접한 기분은 잊기 힘들다. 내가 소개시켜줬는데 나보다 훨씬 열성팬이 된 사촌동생이, 야근중이던 내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가요제 행사장에서 동생은 "오빠,오빠,오빠! 어떡해,어떡해! 대상이야, 대상!"이라며 흥분된 중계방송을 보내왔다. 전화기 너머로 박수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날 집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기억이 없다.

첫앨범이 나왔다. 시디를 여러장 구입했다. 한 군데에서 사지 않고, 발품을 팔아 여러 가게를 돌아다녔다. 가게마다 주인이 기억하기를 바라며, 굳이 그 음반이 있는지 물어보고 잘 팔리냐고 덧붙였다. 사온 시디는 주변에 인심좋게 돌렸다. "친구에요"라며 으쓱했다. 시디를 다 돌리면 또 사러갔다. 잘 모르던 동네 시디가게를 모두 알게 됐다.

어느날 사무실 한곳에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는데, 친구의 노래였다. 냉큼 달려갔다. 친구 그룹을 좋아한다는 여사우였다. 친구라고 자랑했다. 그는 "잘 생겼냐"고 물었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보라고 했다. 무척 흐뭇했다.

연애시대. 사진출처: 서울방송
연애시대. 사진출처: 서울방송

친구는 유명해졌다.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라디오에도 나왔다. 인기 드라마의 주제곡을 불렀고, 그해 손꼽히는 '신인'의 반열에 올랐다. 친구 이름을 얘기해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친구 그룹도 긴가민가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난 너를"하며 노래를 불러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디 10장을 사서 그에게 떠맡겨버리고는…

지난해 그 '착한 방송 프로그램이 나오던 토요일 오후가 되면, 난 나름대로 '본방 사수'에 열을 올렸다. 텔레비전이 있는 식당에 들어가 채널을 돌려달라고 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디엠비(DMB) 단말기 작은 화면에 온 정신을 쏟기도 했다. 친구의 쿼텟은 장르를 넘나들며 관객과 평가단의 찬사를 끌어냈다. 그들의 음악성이 인정받을 때면, 내가 칭찬을 듣는 양 기분이 우쭐했다.

얼마 전 2집이 나왔다. 컴퓨터로 다운받고, 휴대전화로 옮겨서 들었다. 한동안 앨범 전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에 두어번씩은 듣고다녔다. 노랫말이 귀에 박혔다. 멜로디가 입에 익었다. 전에 없이 출퇴근길에 노래를 흥얼댄다. 회식 때 노래방에서 부를까? 괜히 망치지나 않을까?

인터넷서점에서 시디를 10장 주문했더니 그날 곧장 도착했다. 바쁜 와중에 친구를 잠깐 만났다. 친구는 사인시디라며 1장을 건넸다. 나는 사인을 해오라고 10장이 든 상자를 건넸다. 아마 좀 더 기다리면 10장의 사인시디가 내게 올 것이다. 앗싸. 자랑거리 생겼다.

결혼식 축가는 한때 이들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했다. 친구는 요즘도 해마다 50~60차례의 결혼식에 가서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사진은 2002년 대학 후배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모습.
결혼식 축가는 한때 이들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했다. 친구는 요즘도 해마다 50~60차례의 결혼식에 가서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사진은 2002년 대학 후배의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는 모습.

가수인 친구가 있다는 것

친구는 지난 몇달 음반 준비하느라 두문불출했다. 나로선 몇달만의 만남이었다. 그를 통해 직접 들었다. "그 노래 만들 때, 나는 네 생각 많이 했다. 네가 노파심이 꽤 있잖냐." 노파심. 노파, 노파, 노파…할머니…이런. 정말이었군. '뜨끔+허걱'할 만 했군.

문득 가수인 친구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흘러, 가수가 되고 싶었던 친구의 노력은 어느덧 열매를 맺었다. '가수 지망생 친구'는 '가수인 친구'가 됐다. 그와 공유한 기억이 음악이 돼 세상을 만나는 일도 생겼다. 혹시나 길거리에서 그 노래를 흥얼대는 사람을 보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즐겁고 재미있을까. 기적같은 일이다.

"자주 보면 좋기야 좋겠다만… 짬내기 힘들 정도로 바쁜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또 잔소리한다. ㅋㅋㅋ 그렇긴 하지." 그렇다고 변한 건 없다. 인기가 적든, 많든, 없든, 가수 생활을 은퇴하든 결국 친구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음악적 장수'를 기원했다. 무대에 섰을 때 가장 즐거워보이는 친구가,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장수할 때는 장수하더라도, 이번엔 새 앨범이 나왔으니 '대박'을 기도할 시점이다. 다시 시작되는 개인적 비공개 홍보활동.

"스○소○○ 알지? 왜 있잖아, '~난 너를' 불렀던 애들. 2집 나왔는데 들어봤어? 되게 좋더라."

이번엔 어디까지 티를 내야 하나. "내 친구야"가 입 속에 맴도는데, 하는 게 좋을지 안 하는 게 좋을지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 글의 내용상 불가피하게 특정 가수와 음반에 대한 홍보성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가, 기자가 참여한 <블로그>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한겨레 블로그 내가 만드는 미디어 세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