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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남미에서 기억해낸 유년의 원색

등록 2008-03-13 19:39

김병종 전시회 ‘길 위에서’
김병종 전시회 ‘길 위에서’
김병종 전시회 ‘길 위에서’
강렬한 색채로 다가온 여행느낌
한지·나무판에 아크릴로 그려
“어릴적 색 경험 되살아나

<지리부도>를 끼고 산 시골아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면 정말 홋카이도야! 킬리 킬리 킬리만자로!” 땅이름을 이용한 주문놀이가 시들해지자 책벌레가 됐다. 사르트르, 카뮈, 레마르크, 도스토옙스키, 모파상, 앙드레 지드, 하인리히 뵐, 다자이 오사무, 이노우에 야스시, 모리 오가이, 엔도 슈사쿠….

환상을 즐기던 그 중학교 2학년짜리가 40년 세월을 넘어 전시회를 연다. ‘길 위에서’라는 제목으로 갤러리현대(02-734-6111~3)에서 26일까지. 그는 그 세월 동안 미대생, 미술관장, 미대학장을 거쳤고 10년 동안 바보처럼 ‘바보예수’를 그렸고, 또 다른 10년 동안은 ‘생명의 노래’를 불렀지만 돌고 돌아 다시 중학교 2학년 원점이다.

불타는 석양의 가을강, 선홍빛 와인 잔 너머로 날리는 눈발, 애잔한 색소폰 소리, 보랏빛으로 이동하는 이역의 구름, 햇빛에 반짝이는 카리브, 끝 간 데 없는 연둣빛 풀밭, 조용히 흔들리는 숲, 오래된 바닷가의 찻집….

한지 또는 나무판에 아크릴로 그린 작품들. 전시회는 환각을 찾아 라틴아메리카를 다녀온 화첩인 셈이다.

꽃뱀 같은 닭, 팬티만 걸친 소년, 버섯 같은 나무, 닭벼슬을 닮은 선인장, 다섯 손가락 야자수, 딱총 같은 물고기…. 화가의 눈을 거친 남미 자연물은 하나같이 패턴화해 있다. 긴 세월 대를 이으면서 양식화한 민화처럼 같은 모양, 같은 색깔이다. 쉰여섯 화가의 붓과 색감은 옛 시절로 돌아가 있다. 당연히 원근법이 소멸된 공간이다.

“남미에 가보니 삶 자체가 강렬한 색채 잔치더군요. 미술관의 그림 속 색채가 밖으로 튀어나와 집, 담, 옷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짙푸른 산천, 새빨간 산닭, 붉은 진달래, 보랏빛 자운영 등 어려서의 색경험이 함께 되살아나더군요.” 현지에서의 충격이 기억회로를 거친 색감각을 불러냈고 그것은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색인 중간색이나 무채색이 아니라 원시의 강렬한 새빨강, 샛노랑, 새하양이다.


김병종 전시회 ‘길 위에서’
김병종 전시회 ‘길 위에서’
여행은 선택. 작가가 흠흠거리며 들른 곳은 쿠바, 멕시코, 아르헨티나, 페루, 브라질, 칠레. 그곳에는 체 게바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프리다 칼로, 카를로스 푸엔테스, 보르헤스, 파블로 네루다 그리고 로맹 가리가 살았다. 불꽃처럼 피어나 불꽃처럼 산화한 사람들. 중2 때 사르트르나 카뮈처럼 영화로, 시집으로, 그림으로 작가를 사로잡았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원색적인 삶의 흔적 역시 작가의 기억에서 원색을 불러냈다.

“삶이 반들반들해진 탓이지요. 무라카미 류가 쿠바로 간 것처럼 색을 회복하려는 시도랄까. 스케치북과 메모지를 들고 여행을 하고 나면 정신적 분비물이 수북해져요.” 작가에게 라틴 여행은 에너지였다. 여행 자체가 화업이다. 삶 자체가 여행이 아니겠는가.

길 위의 자잘한 것에 작가의 눈길이 머문 것은 ‘바보예수’ 연작 무렵 연탄가스 중독으로 경을 치고 난 뒤. 병상을 털고 일어나 마주친 2월 청보리 새싹이 그렇게 푸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생명의 노래’로 구체화됐고, 틈틈이 여행길에서 마주친 사소한 것들은 여러 권의 <화첩기행>으로 남았다. 그동안은 삽화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이번 전시를 계기로 독립하겠다는 게 작가의 구상이다. 인도와 네팔, 북유럽,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등 권역별로 묶어 그 지역 사람들의 삶과 예술 등을 그리고 싶다는 꿈. 앞으로 10년은 너끈히 우려낼 주제다.

“제 그림에서는 문기(文氣)가, 글에서는 화기(畵氣)가 느껴진다고들 해요.” 문학소년에서 문학청년기를 거친 탓일 터이고 작가가 재직하는 학교의 내림이기도 할 터이다. 한동안 그림에서 문기를 빼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제는 포기했다. 스스로 체질이거니 여기고 남들은 특장이라고 쳐준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층이 두껍다.


김병종 전시회 ‘길 위에서’
김병종 전시회 ‘길 위에서’
‘저 너머’에 있는 그리움을 찾아 다니는 작가는 노년 얘기를 했다. 비틀비틀 걸으며 지상의 것을 다 보고 나면 교향악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고 싶다는 것. “땅이 아닌 천국은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호기심. 때가 되면 흐릿한 거울을 통하지 않고 얼굴을 맞댄 듯이 그곳이 분명하게 보일까. 작가는 딱 중학교 2학년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면 정말 홋카이도일까?”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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