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래 조각전 ‘나무, 근원적 형상’
이길래 조각전 ‘나무, 근원적 형상’
으스스하다. 무정형 돌연변이 생물체가 꿈틀꿈틀 촉수를 뻗어와 휘어감을 듯하다. 어떤 놈은 벽 속에 정체를 감춘 채 촉수를 내밀어 홰홰 휘젓고 있다.
하지만 만져보면 딱딱한 구리다. 굵기가 다른 서너 종류의 동파이프를 잘게 잘라 우그러뜨린 다음 이어붙여 만든 조각이다. 돌연변이체도 알고보면 소나무 뿌리다. 지하의 자양을 빨아올려 사철 푸르러 절개의 상징으로 사랑받는 소나무를 고이는 그것. 흙과 바위를 단단히 움켜쥐어 바람에 아니 뮈게 하는 그것이다.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땅 속의 것을 드러낸 탓이요, 무지막지하게 키운 탓이다.
이길래 조각전 ‘나무, 근원적 형상’이 사비나미술관(02-736-4371)에서 4월20일까지 열린다. 조각과 설치작품 모두 소나무다. 줄기, 뿌리, 나이테까지 이파리를 빼고는 다 있다. 작가가 주목한 것은 구불구불 소나무의 강인한 에너지. 그것보다도 더 끌린 것은 거북등처럼 갈라진 껍데기의 질감이다. 무늬들이 위로 갈수록 작아지면서 시각적으로 원근감을 강조하는 형세도 흥미로웠다고 작가는 말한다. 기실 동파이프 작업은 2003년부터 해왔고 호박, 고추, 마늘, 양파, 전구 등 예쁜 것들이었다. 그 점에서 이번 작업은 지갑 가진 이보다 맑은 눈을 가진 이를 위한 서비스다.
벽에 걸린 부조는 수묵으로 그린 벽화 같고, 쇠로 된 액자 속 부조는 창 너머 소나무처럼 느껴진다. 천장을 뚫고 바닥까지 내려온 거대한 뿌리는 땅 속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이, 3미터에 이르는 스물세 그루 나무기둥 사이에서는 작은 숲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작품을 감상하는 또 다른 방법. 멀리서는 꿈틀꿈틀 생명력이지만 가까이 가면 거친 노동의 흔적이다. 수천 개의 조각에 전기톱 소리와 용접 불꽃이 그대로 묻어 있다. 벽에 비친 그림자는 보너스다. 구리 고리들이 동그라미로 바뀌면서 조각품이 흑백 드로잉으로 변환돼 있다. 작가가 부식으로써 애써 나타내려는 명암이 그림자에는 단번에 구현돼 있다. 애초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린 작가의 드로잉보다 훨씬 좋다고 말하면 실례일까.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이길래 조각전 ‘나무, 근원적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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