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극 ‘네페스’
유목주의가 피나 바우쉬의 작품처럼 잘 어울리는 경우가 또 있을까. 수십년째 피나는 독일 부퍼탈에 근거지를 두었지만, 철새처럼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국내에도 소개된 <마주르카 포고>나 <러프컷> 같은 ‘도시 시리즈’에서는 아예 낯선 도시를 방문해 그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이번에 국내에서 공연한 <네페스>도 이 도시 시리즈의 일환으로 터키의 이스탄불을 그린 작품이다. 조각보를 붙이듯 인과에 구애받지 않는 장면 배열이나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춤과 연극을 뒤섞는 피나 특유의 탄츠테아터(무용극)적 속성은 여전하다.
그런데 터키에서 피나와 그녀의 무용수들은 무척 행복했나 보다. 역동적 이미지로 한국을 그렸던 <러프컷>에서는 발견하기 힘들었던 인간에 대한 부드러운 신뢰, 터키 말로 ‘숨’이라는 의미를 가진 <네페스>가 시사하듯 근원적이면서도 생기 있는 삶의 행복이 도처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에는 교통지옥이나 가부장주의처럼 심각한 문제도 존재하지만, 피나와 공연자를 보다 사로잡은 것은 복잡하고 고독한 현대인이 놓쳐버린 인간다움이다. 먹고 씻고 유혹하고 사랑하며 아이를 낳는 일상의 행복, 삶의 고통과 격렬하게 싸우는 호방함과 장쾌함, 잠시도 혼자 있게 내버려두지 않을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는 그래서 살아있음이 흥겨운 잔치 같은 터키적 삶의 풍경.
이런 소소한 삶의 환희는 생명의 원천인 물의 이미지와 포개지면서 인간에 대한 근원적 성찰로 비약한다. 이미 70년대에 무대에 도랑을 팔 정도로 피나의 물에 대한 애착은 정평이 난 것이지만, 이번에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경계로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진 이스탄불의 지형적 특성 탓인지 물 자체가 이 공연의 주인공이었다. 터키탕의 물비누 거품으로 소박하게 시작한 공연은 후면무대를 채운 물웅덩이와 폭우와 바다 영상으로 확장되었고, 벽면에 잔잔하게 파문이 일던 물그림자와 무용수들의 대비는 공연 내내 인간다움, 인간적 삶이란 무엇인지 성찰하게 만들었다.
<네페스>의 마지막 장면은 생명의 근원 같은 물웅덩이를 사이에 두고 남자 무용수와 여자 무용수들이 마주본 채 진행되었다. 최근 들어 동양적 움직임에 부쩍 매료된 피나는 그 장면의 움직임을 명상이라도 하듯 천천히 그러나 유혹이라도 하듯 사뿐하며 고혹적인 앉은 걸음으로 연출하였다. 그 평화로운 구애의 장면을 보고 있자니 세상의 모든 다른 존재들, 남자와 여자, 유럽과 아시아, 독일과 터키, 공연과 관객이 만나는 듯하였다. 그러고보니 인간은 신의 입김으로 만들어졌다. 인간다움이란 결국 다른 존재들이 만나고 알아가며 그리하여 통하는 <네페스>인 것이다.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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