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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감상에 빠진 ‘존재의 성찰’

등록 2008-03-27 20:01

연극 ‘이름을 찾습니다’
연극 ‘이름을 찾습니다’
[리뷰] 연극 ‘이름을 찾습니다’
이름은 무엇일까. 셰익스피어는 장미라는 이름이 없더라도 장미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존재한다고 했다(<로미오와 줄리엣>). 장미라는 이름은 장미의 본질이나 실체와 상관없이 그저 장미를 지칭하는 약속이나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다. 이름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존 프락터의 비극을 그린 <시련>에서 아서 밀러가 주장하였듯, 인간은 이름을 위해 전부를 건다.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이고 지켜야 할 자존심이고 운명이다. 오죽하면 성공한 사람은 이름을 날렸다 하고 실패하면 이름값도 못한다 하며, 운명을 바꾸고 싶으면 작명소에 가서 이름을 바꾸겠는가.

2006년 거창연극제에서 호평을 받았고 이번에 다시 재공연되는 극단 수의 <이름을 찾습니다>(구태환 작·연출)는 매춘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퇴락할 대로 퇴락해 섬에서 낚시하러 온 손님을 받는 매춘 여성, 로즈와 달래의 이야기다. 활달하지만 본명을 숨긴 로즈는 세상으로 나가 댄서가 되기 위해 몸을 팔고, 사채업자에게 신체포기각서라도 썼는지 대학을 나왔으면서도 매춘을 하는 달래는 세상으로 나가는 로즈에게 자신의 이름을 건넨다. 비록 몸은 로즈처럼 세상에 나갈 자신이 없더라도 이름을 통해서만은 탈출하려는 듯 말이다.

그동안 한국 문학이나 예술에서 매춘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은 꽤 많았다. 대부분 그녀들은 능욕의 역사나 가난을 이기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했던 한국적 근대의 희생적 상징물로 그려졌고, 벗은 몸을 보다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상업적 목적으로도 기꺼이 활용되었다. 어느 쪽이든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구태환의 <이름을 찾습니다>는 계몽적 작가주의나 상업주의 어디에도 편승하지 않으면서 이름을 숨겨야 하는 매춘여성의 존재를 담담히 성찰하게 해주었다.

사실 조금 더 그 주제를 부각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다. 제목부터 구도에 이르는 뼈대에서는 이름을 갖지 못한 존재의 위기를 성찰하면서도, 정작 디테일에선 두 매춘여성의 소박한 자매애를 부각하느라 감상주의로 귀결된 아쉬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이 인간의 운명이듯 작품의 제목은 작품의 운명이기도 하다. 작품을 쓰고 연출한 구태환이 그 제목을 통해 도달하고자 한 지점이 무엇이었는지, 다음 재공연에서는 좀더 고민해주기 바란다.

김명화/연극평론가·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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