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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속절없는 세대를 위한 헌사

등록 2008-04-10 22:06

처녀적 만지지도 않던 고등어를 썰다가 문득 자신의 청춘이 지나갔음을 알게되는 중년의 여성. 알고보면 지극히 정상적이지만 툭 잘라놓고 보면 칼을 들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 꼭 미친년 같지 않은가(박영숙의 〈미친년〉
처녀적 만지지도 않던 고등어를 썰다가 문득 자신의 청춘이 지나갔음을 알게되는 중년의 여성. 알고보면 지극히 정상적이지만 툭 잘라놓고 보면 칼을 들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 꼭 미친년 같지 않은가(박영숙의 〈미친년〉
40-50대 작가 20명의 ‘봄날은 간다’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눅진한 슬픔 뒤끝에는
얄궂은 나이테 하나…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노래는 40대 중반을 넘겨야 제대로 부를 수 있다. 오리지널 백설희에 이어 부른 한영애, 심수봉, 조용필, 장사익이 그렇다. 구성진 가사과 가락은 그 쯤의 세월을 필요로 한다. 봄이 나이테처럼 몸에 새겨져 해마다 때가 되면 중늙은 몸과 시절의 편차에서 봄을 체감하기 때문이다. 자칫 청승스러움에 그칠 노래를 슬픔과 관조의 중간에서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도 나이 때문이다.

차규선의 〈매화〉
차규선의 〈매화〉
같은 제목의 미술전시회가 광주시립미술관(062-510-0700)에서 열리고 있다. 주로 40, 50대인 작가 20여 명이 참여해 회화와 설치, 사진, 영상 작품을 선보인다. 제목 탓일 거다. 전시장을 도는 동안 내내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 것은…. 전시를 기획한 변길현 학예연구사는 관객이 자유롭게 느끼도록 굳이 작품설명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 그럴 필요가 없을 터이다. 짙은 진달랫빛 펼침막에 쓰인 ‘봄날은 간다’라는 날렵한 서체보다 더 강렬한 신호는 없기 때문이다. 변 학예연구사는 40대 말~50대 초 관객이 타겟이라고 밝혔다.

40대 말, 50대 초는 누구인가. 유신과 5공의 서슬퍼런 때 최루탄 연기를 마시며 이뤄낸 성과가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으로 어이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목격했고 동질집단의 집권을 이뤄냈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잃어버린 10년’이라며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형편이다. 참으로 속절없는 세대다. 긴 겨울 뒤에 화라락 꽃 피우고 겨울의 반사태인 여름에 시간을 넘겨주는 봄처럼.

하지만 전시장은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봄날은 간다> 노래가 소리없는 배경음으로 깔렸을 뿐이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작품들은 하나하나 명사 ‘봄날’이고 작품들 사이에 동사 ‘간다’가 존재한다. ‘작품’과 ‘사이’는 이어진 고리가 되어 ‘봄날은 간다’는 노래를 완성하는 모양새다.

작품들은 ‘봄날은 간다’를 여러 버전으로 부른다. 고양이 수염처럼 늘어진 피아노선(김황록), 몽환적인 미인도(이순종),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이서미), 분홍 장미밭(장지아)에서 시간을 초월한 백설희의 낭낭함이 들린다. “아이고 다리꼬뱅이야”를 외치는 듯한 무릎관절(김일용), 새장에 갇힌 여인(김진화), ‘다라이’를 끄는 몸뻬(안현숙), 고등어를 자르다 문득 멈춘 ‘미친년’(박영숙)에서는 한영애의 눅진한 슬픔이 묻어난다. 구겨진 풍경(정운학), 봄볕의 짙은 그림자(이이남), 바람부는 들녘(민병권), 봄 아지랑이 피는 들판(유근택), 고개를 넘는 구붓한 등짝(박병춘)에서는 조용필의 서러움이 뱄고, 흐드러진 매화(차규선), 봄비 못(권기수), 음화식물(최광호), 커튼 밖 봄(윤익)에는 심수봉의 콧소리가 섞였다. 건널목 저편 하염없는 행인(하봉호), 빛바랜 까까머리 기념사진(안창홍)에서는 장사익의 노래가 애절하다.

권기수의 〈검은숲〉
권기수의 〈검은숲〉
미술관 쪽은 지나가는 청춘이나 시간에 대한 아쉬움뿐 아니라 시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다채롭게 살고자 하는 느낌이 들도록 연출했다고 말한다. 봄날은 분명히 가고 꽃을 이울 테지만 때가 되면 다시 우리 앞에 돌아오는 것처럼. 잔잔함으로 들머리를 삼고 원색적인 충돌과 조화를 거쳐 끄트머리에 따뜻한 작품을 배치한 것은 기획자의 용의주도함이다.

가는 봄이 아쉬운 것이야 장소를 가리지 않지만 유독 그 정도가 절절한 것은 광주이기 때문이 아닐까. 흐드러진 봄은 전남대 앞, 금남로, 도청 앞을 지나 망월동으로 이어져 있다.

‘열아홉 시절엔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전시는 5월14일, 봄의 끝자락까지 이어진다.

광주/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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